칼럼/ 무당과 과학
칼럼/ 무당과 과학
  • 한국에너지신문
  • 승인 2001.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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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초에 바람이 있었다. 갑작스럽게 흑암같이 변해버린 하늘 아래 원시림의 거목들을 뒤흔들고 가는 강풍이 예사롭지 않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천둥 번개가 쳤다. 억수같은 장대비가 지상을 휩쓸었다.
이런 자연현상 속의 원시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공포에 떨었을 것이다. 대자연 속의 인간의 vulnerability(상처받기 쉬움)를 그들은 누구보다 절실히 공포 속에서 느꼈을 것이다. 이런 우발 현상들, 즉 contingency(우발사건)는 바람, 강풍, 천둥, 번개, 폭우 외에도 무수한 현상을 일으키고 원시인들을 더욱 무섭게 만들었을 것이다.
마침내 원시인들은 무릎을 끊고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무서운 신의 눈을 보았을 것이다. 신의 현상은 세상을 풍미하게 되었다.
인간이란 어쨌든 이모저모로 궁리하는 존재이니까 이 신에 대한 경외감을 대표적 존재 하나를 내세워 해결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것이 즉, 필자가 상정해본 무당 탄생의 과정이다. 무당들의 역할은 주로 intangible한(무형의) 사물을 다루는데 있었다. 사람의 운명을 알고자 했다. 인간의 복을 빌어주었다. 그런가 하면, 영감, 즉 육감에 의해 intangible한 사물을 찾아내는 역할도 한 것이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무당의 역할의 하나는 바로 이 육감에 의해 intangible한 사물을 찾아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칼럼은 석유산업에 대한 칼럼이고, 석유산업 초기에 무당이 석유탐사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석유산업 초기의 또 하나의 이면을 추적해가기로 하자. 한때 브류워 왓슨 회사라는 목재 회사 사장이었던 조나던 왓슨은 드레이크 정 시추 사업을 도운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는 석유산업 역사상 미국 최초의 대규모 wildcatter(석유산업 초기의 투기적 석유탐사자들)로 기록되고 있는 사람이기도 한다.
1871년의 산유지역의 한 신문은 그를 '제1의 유전 운영자'라고 호칭했고, 그가 직접 시추했거나 관심을 가지고 시추한 유정이 2000개정에 달한다는 기사를 내었다. 어떤 작업 인부에게 11b/d(b/d:1일 생산량)짜리 유정을 공짜로 넘겨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그야말로 호사스런 인생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런 그도 펜실베이니어의 다른 지역인 브래드포드에서 석유 붐이 일자 그곳에 뛰어들어 장기간의 dry hole(석유가 발견되지 않은 시추공)을 기록하고, 기껏해야 소규모 유전에서만 성공하는 등으로 해서 수백만 달러와 자신의 저택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석유 세계에서는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전락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있어서 최소한 한가지 점만은 기억에서 스쳐 지나가게 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즉 그는 오일풀(oil pool) 발견을 '심령'에 의지한 최초의 오일 맨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그의 아내는 영매였다. 그래서 그는 그의 탐사작업에서 그의 아내에게 역할을 맡겨 비위를 맞춰주고는 했다. 그는 마침내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목소리를 믿게끔 되었다. 다른 영매들을 이용했다는 점이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우리는 왓슨의 영매들이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대한 기록을 접할 수는 없지만, 어떤 최상의 마을에서 어떤 최상의 유정을 선택하게 되는 이유를 알만하다. 그것들을 비교해보면 어떤 유사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제임스라는 이름의 어떤 영매가 말 한필이 끄는 경마차를 타고 유유자적 시골길을 가고 있을 때 갑자기 그는 그의 심령의 인도에 동요하게 되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이러하다. 그는 곧 자기가 자기 육체 속에 있는지 육체 밖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경마차에서 밀쳐내져 떠밀려갔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다음, 그는 땅 위에 내던져졌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 땅에 표시를 해놓고 1페니짜리 주화를 몇 인치 땅 속에 묻었다. 그리고는 배를 깔고 그 위에 드러누웠다. 조용히 누워있자 그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되었고, 눈이 감겨졌고, 얼굴이 창백해졌고, 맥박이 약해졌다. 이러한 모든 상태가 그가 누운 땅 밑에 엄청난 양의 석유가 묻혀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그는 이해했다.
실제로 그곳에서는 석유가 발견되어 100b/d가 넘는 생산이 얼마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위치찾기'의 대가라는 호칭을 얻어, 그 쪽 방면으로 큰 사업을 벌여갔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그는 석유가 나는 곳을 찾아주겠다는 약속을 너무 많이 했고, 신뢰할만한 유전지대에서 빗나간 장소를 너무 많이 헤매었다. 그가 헤맨 이곳 저곳에서 dry hole을 기록하는 데만 그친 것이다.
말하자면 석유산업 초기 석유를 찾은 이들에게도 이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횡재를 바라고 요행수를 바라는 이들은 아프리카인의 주술 신앙이나 다름없는 그들 나름의 신앙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석유탐사에 Doodle bugs(점(占) 지팡이)를 이용했다면 오늘날의 사람들이 얼마나 웃을까마는 이것은 결코 웃을 일이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수맥을 찾는데 어떤 나무가지를 이용한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다.
占지팡이-이것은 석유산업 초기 석유지대에서 구어적(口語的)으로 사용되던 말이다. 이 말은 석유 발견에 이용되던 의사과학적(擬似科學的) 장치를 나타낼 뿐 아니라 이 장치의 사용자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한다. 이 장치는 미국의 와일드캐터들이 영매를 이용한 석유탐사를 하던 시기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장치 중 최초의, 그리고 가장 일반적인 것은 죤 피스케(John Fiske)가 의미를 밝혀내기 위해 추적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 전설의 근원은 원시인들이 자연적 현상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게 되기 훨씬 이전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피스케는 전설의 추적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가장 나이든 인디언 어른이 포오크 모양의 개암나무 가지를 양손에 들고 길을 오르락 내리락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포오크 모양의 개암나무 가지는 Y자를 거꾸로 한 형상이었다. 그는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펴고 양 손바닥에 줄기가 위를 향한 그 형상으로 나무가지를 올려놓고 있었다. 그가 어떤 지점에 머물 때마다 나무줄기가 점점 아래로 기울어져 마침내는 정상적인 위치를 찾은 모양이 되는 것이었다. 그 나무 줄기는 그 때 땅 밑의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하나씩 그러한 실험을 되풀이했는데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땅 속의 무엇인가가 개암나무 가지를 홀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지점을 지날 때마다 나무 줄기가 아래로 향해 그 무엇인가를 가리켰던 것이다.”
그 포오크 모양의 나뭇가지는 피스케의 손에서는 제대로 작용하지 않았지만 그는 석유를 발견하는데 이 방법을 사용한다 해도 별로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래 전부터 석탄이나, 철, 금, 묻혀진 보물, 심지어는 숨겨진 범죄를 찾는데 이 방법이 도입되었던 것이다.
드레이크 유정 시추 성공을 도왔던 실리만 교수는 당시 이런 말을 했다. “점(占)에 의지하는 행위처럼 무가치한 것이 있을까?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광물의 근원을 발견하는 기술은 사기이다. 이성과 상식에 반하는 일이다. 자연 법칙을 무시하는 일이며, 우주적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심지어는 의심많은 오일맨들 조차도 포오크 모양의 막대기로 성공한 지역 근처의 땅을 리스하려고 떼지어 몰려들었다. 그것은 마치 영매를 이용해 유정 발견에 성공한 지역으로 오일맨들이 몰려들던 것과 흡사했다. 영매를 이용해서 석유 찾는 일이나 점지팡이를 이용해서 석유를 찾는 일은 오일맨들에겐 그렇게 신비스런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에겐 그들이 매일 대하는 땅처럼 신비스런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에도 점지팡이는 여전히 존재한다. 석유 탐사에 영매의 지시를 이용하는 일은 공식화되지 않았지만, 그런 식의 석유 탐사의 절차는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1927년과 1928년에 남서부 온타리오에서는 두 개의 전극을 놋쇠 막대기에 연결한 정교한 형태의 점막대기가 등장해서 석유 탐사에 이용되었다. 오일 풀이 있는 지점에서는 그 점막대기의 한 쪽 끝이 올라가고 내려가고 했던 것이다. 20세기 초반에 미국 서부 중부에서는 자동차 라디오 수신기에 연결된 장치가 이용되기도 했다. 1943년 오클라호마에서 발견된 한 oil pool은 그 발견 과정에서 실제로 점 막대가 이용되기도 했다.
한편 석유탐사에 있어서 때때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생기게 된다. 예를 들면 꿈에 본 석유지대에서 석유가 발견되는 따위의 일이다. 한때 dry hole을 기록해서 버려진 두 개의 유정 사이에 훌륭한 유정이 발견된 꿈을 꾸었다는 세일즈맨이 있어 사람들을 웃긴 적이 있다.
 그 세일즈맨은 아마츄어 투자가들과 사업체를 형성, 그곳을 시추한 결과 석유를 발견하는데 성공, 거의 20년 동안이나 석유를 생산해 떼부자가 될 수 있었다.
펜실베이니어의 석유지대 중심인 Oil Creek를 가로지르는 '하이드와 에그버트의 농장'이 있었는데 케플러란 사람이 관리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 케플러란 사람의 형이 어느 날 밤 케플러가 인디언이 쏜 화살에 사살당하는 꿈을 꾸었다. 그 때 어떤 예쁜 여자가 그에게 총을 건네주었고, 이에 놀란 황인종들은 멀리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석유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며칠 후 케플러의 형은 동생이 관리자로 있는 '하이드와 에그버트의 농장'을 방문하고 꿈에 본 곳과 똑같은 곳을 확인했다.
그는 세명의 파트너를 구한 다음 1에이커를 리스(임차), 시추에 들어갔다. 시추정 이름은 '예쁜 여인'이었다. 물론 석유는 발견되었다. 1,200b/d의 석유가 솟구쳐 올랐던 것이다.
이 유정에선 1년동안 평균 800b/d가 생산되었다.
이러한 것들, 이 모든 것들은 석유산업의 서사시 시대(the age of epic poem), 즉 석유산업 초기의 일로서 다분히 전설의 성격을 띄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석유를 찾는 일, 현대의 석유탐사는 최첨단 기술의 종합적용 분야로 변해있다. 물론 무당의 탐사기술보다 과학기술에 의한 성과가 월등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필자는 석유산업의 서사시 시대의 epic poem한 성격이 무당과 같은 환상 추구의 존재를 끌어들였으리라 추측해보는 것이다.
어쨌든 地上은 현실이다. 그러므로 필자도 과학 쪽을 더 신뢰하는 편이다.
그러나 과학은 善한 쪽으로만 인도될 수 있을까? 과학의 risk, 부정적인 면 또한 인류가 고려해야 할 요소는 아닌가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승재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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