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리뷰/ 석유의 古代史 ⑧
에너지리뷰/ 석유의 古代史 ⑧
  • 한국에너지신문
  • 승인 2003.1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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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서부 정착지의 소금과 석유(1)

미국에서의 석유 개발은 중부 유럽이나 기타 다른지역과 마찬가지로 소금산업에 부수된 것이었다.소금은 너무 중요한 필수품이었기 때문에 이튼은 그의 1824년 에리호 운하 루트 지질 조사에 있어서 소금을 함유한 암석에 특별히 관심을기울였다.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동부 대륙(유럽과 중동)에 있는 모든 암석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미국 혁명 전쟁 이후에 정착은 아팔라치아 산맥 너머로 급속히 확대되어 갔는데 부담이 과중했던 소금 수송 비용은 상업적 염수의 광범위한 탐사와 지방 소금 사업의 개발을 부추겼다.미국 초기의 자서전 중 가장 흥미진진한 것의 하나는 죤 로버트 쇼우의 자서전이었는데 그는 1793년과 1806년 사이에 켄터키에서 으스대던 우물 파는 사람이었다.그는 마술 장치를 사용해서 염수와 담수의 위치를 알아냈고, 손 도구로 56피트 깊이까지 팠다.물론 발파용 폭약도 사용해서 말이다 세련되지않은 시추 방법이 도입된 것은 그 직후의 일이다.
시추에 의해 석유 및 가스와 염수의 일반적 연관성이 신속히 밝혀지게 되었다. 식민지 서부 시대의 경이 중의 하나는 토마스 제퍼슨이 1771년에 방문했던, 오늘날의 촬스톤 부근의 대 카나와강의 “불타는 샘”이었다. 죠지 워싱톤은 대 프랑스 전과 대 인디안 전의 공로를 들어 버지니아 식민지가 그에게 수여한 땅과 함께 이 불타는 샘의 연고권을 얻기위해 그 곳을 점유했다.
<이 장소는.....앤드류 루이스 장군과 나를 사로잡았는데 그것은 이 장소에 속한 역청 샘이 너무 불붙기 쉬운 성질을 가지고 있어 정기처럼 자유롭게 갑자기 불붙는가 하면 끄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워싱톤 대통령은 그의 뜻에 따라 이 재산을 공중에게 유증했다.이 워싱톤의 땅에서 3마일 가량 떨어진 곳에서 죠셉 러프너는1794년에 502에이커를 사들였는데 그것은 그곳의 염수를 개발하기 위함이었다.그의 아들들은 1807-1808년간에 염정을 58피이트 깊이까지 시추했다.러프너 일가는 손으로 작동시키는 스프링 폴을 속이 빈 통나무로 케이싱해서 첫 번째 염정을 시추했는데,그들은 그 이후의 작업을 위해 보다 효과적인 도구와 금속 케이싱을 설계했다.소금 사업이 확대되는 동안 타격 시추의 미국식 시스템의 주요 요소가 이곳에서 개발되었다.빌리 모리스는 1841년에 시추단지(병)의 특허를 획득,실제 시추 심도를 2000피이트까지 증대시켰다.
S.P. 힐드레트는 1831년 카나와 염정 지대를 조사하는 중에 소금에 수반되는 석유와 가스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석유는 그 양의 다소간에 카나와의 대부분의 염정에서 솟아나왔다. 수면 위로 솟아나온 석유를 끌어모아 때때로 국자로 퍼내어 팔거나 사용하기 위해 따로 놓아 두었다.>
(참조: Trek of the Oil Finders, E.W.Owen 등)

<이승재 칼럼니스트/ sjlee44@petro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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