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리뷰/ 석유의 古代史 ⑦
에너지리뷰/ 석유의 古代史 ⑦
  • 한국에너지신문
  • 승인 2003.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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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과 펜실베니아의 석유 가스 샘들


드레이크 이전에는 아메리카에서 ‘Seneca oil’이라 불리는 석유가 사람과 짐승의 중요한 약품이었으며 무역의 중요 상품의 하나였다.
펜실베니아 오일 크리이크의 석유 샘들은 많은 여행가들의 관심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자세한 정보를 전해주는 기록은 소수에 불과하며 전설의 몇 가지는 허위임이 판명되고 있다.
스웨덴의 식물학자였던 린네(1707∼1778)의 제자였던 피터 캄은 1748년에 이들 석유 샘들을 방문하고 그의 중요한 아메리카 여행담에 이들을 묘사하고 있다. 루이스 에반스는 1755년 그의 훌륭한 식민지 아메리카 지도에 이 석유의 현장을 그려 넣고 있다. 토마스 허친스는 1778년 펜실베니아에서 일리노이즈에 이르는 지역의 광물자원에 대한 地紙적인 묘사와 언급을 실은 책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는 석탄, 점토, 철광석, 소금샘 등을 세심하게 묘사하고 있고, 지도에는 여러군데의 석유를 표시하고 있다.
1783년에 링컨 장군은 그의 군대가 오일 크리이크의 석유를 류머티즘 치료제로서, 하제로서 사용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탁월한 동식물 학자였던 토마스 넛톨은 1821년에 그 석유 샘들에 관한 믿을 만한 묘사를 하고 있다. 미국의 초기 정착자들은 고대유물의 구덩이와 석유 삼출지점에 울타리가 쳐 있고 근원을 알 수 없는 구덩이가 열을 지어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오일 크리이크는 드레이크 대령이 그 옆에서 획기적인 유정 시추를 하기 전까지는 악명이 높은 곳이었다.
뉴욕에 있는 얕은 유정으로부터 새어나온 천연가스는 1821년부터 두 번째 유정이 1850년에 시추되기까지 프레도니아의 여관에서 불로 사용되었다. 그 후 35년간 뉴욕의 천연가스 생산량은 확대되었다. 라파이에트 장군은 1824년 그 곳을 방문하고 천연가스의 편리성에 대해 쓰고 있다. 예일대학의 벤자민 실리만은 1831년 이 현상에 대한 과학적인 보고서를 발간했다.
아모스 이튼은 1824년 그의 뛰어난 에리운하 지방에 관한 지질학적 보고서에서 버논부근의 ‘탄소와 화합한 수소’의 자연적 유출을 묘사하고 있고 헤이즈 박사가 캐나다 이구아에서 동일한 가스를 분석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1841년까지 버지니아와 펜실베니아의 염정에서는 염수를 증발시키기 위해 가스를 연료로 태웠다. 오하이오 핀들레이의 주택지에서는 1843년에 가스를 사용했는데 그 지점은 후에 세계 최대의 석유 및 가스전 지대의 하나로 판명된다.
상업적 가스정은 1858년에 뉴욕 버팔로 근처에서 시추되었다. 그러나 천연가스를 발견하지 못했고 1885년 펜실베니아, 서버지니아, 오하이오 등지에서 갑작스런 개발붐이 일기까지는 개발의 수준이 미미한 것이었다.
천연가스 산업의 느린 성장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물론 파이프 제조기술에 좌우되었음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성공적이라 할 수 있는 인공적 가스시스템은 1816년 볼티모어에서 1830년 보스톤과 뉴욕에서 가동되었다.
1850년에는 56개 공장이 미국의 도시지역에 석탄 가스를 공급하고 있었으며 많은 지방에 그와 같은 공장들이 있었다. 가스 의 전달과 분배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었지만 말이다.
(참조: Trek of the Oil Finders, E.W.Owen 등)

<이승재/ sjlee44@petro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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