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리뷰/ 석유의 古代史 ⑥
에너지리뷰/ 석유의 古代史 ⑥
  • 한국에너지신문
  • 승인 2003.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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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그 석유 출현의 편재성 ①


과장없이 말해 수천개의 석유샘, 가스샘, 아스팔트 광맥, 석유를 품은 노두가 남북 아메리카에서 발견됐다. 이러한 현상들은 원시인들에게나 문명인들에게나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이용의 대상이 됐다.
이들은 또한 아메리카에서 최초의 상업적 유전을 발견하는 길의 안내자 노릇을 했고 현대 석유산업의 첫 번째 반세기 동안 발견된 유전들의 대부분의 단초가 됐다.
그러나 이에 대한 초기의 기록들은 남아 있지 않아 단편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 뿐이다. 스페인의 수부들과 정복자들은 아메리카의 석유 및 아스팔트에 대한 최초의 보고자들이었다.
G. 페르난데즈 드 오비에도 이 발데즈는 1526년 쿠바 아바나에서 그의 배를 기울여 수리할 때 아스팔트 피치를 사용했다.
헤르난드 드 소토는 1543년에, 그리고 그후 많은 관찰자들이 멕시코의 풍부한 석유샘들에 대한 묘사를 하고 있다.
아우구스틴 드 자라테는 1544년과 1551년 사이에 현재의 페루 로비토스 유전 근처의 석유 삼출 지점을 찾아간 적이 있다.
니콜라스 모나르데스는 1565년에 쿠바와 페루의 석유 발생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유명한 ‘바베이도스 타르’는 배의 방수용으로 사용됐으며 1625년경부터 서인도제도로부터 수출됐다.
가장 주목할 만한 석유 매장지는 트리니대드의 대 아스팔트 호였는데 드 레리는 1786년에 이를 묘사하고 있다.
월터 롤리 경은 1595년 트리니대드 아스팔트의 샘플은 수집해갔는데 그러나 그 때 호수는 보지 못했다.
니콜라스 누겐트는 1811년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 이 호수는 국가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특히 강력한 해상권력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다. 이 호수는 정말 특별난 것이므로 그러한 중요성의 대상에 정부의 관심이 더 강제적으로라도 부여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것을 널리 이용시키려는 시도는 대개 미약한 것이었고, 무분별한 것이었다. 그 결과는 모든 시도가 유산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던도날드 백작이었던 토마스 코크레인 제독은 1851년과 1853년 사이에 이의 개발을 위한 일련의 특허를 획득했으나 그것을 개발하려는 그의 노력은 수지 맞는 것이라기 보다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트리니대드의 자원에 대한 영국정부의 관심은 좀 더 나중에 인식 된 것처럼 보인다. 대영제국 지질조사 소장이었던 로데리크 머치슨 경은 1856년 8월 6일 로코크 박사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트리니대드의 피치 샘플을 보내 주신 것에 대해 뭐라 감사 드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런던에서 그것을 받았습니다. 제가 추천한 지질 전문가 2명이 방금 트리니대드에 도착해서 혹서가 지나가는 대로 곧 그들이 작업을 시작할 것이므로 본인은 누겐트 박사의 회고록에서 얻을 수 있는 데이터 외에 그곳으로부터 이 광물 피치의 기원과 성상에 관한 흥미있는 데이터를 얼마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이 두 지질 전문가는 G.P.윌과 J.G. 소킨스였는데 1856∼1858년간 행해진 그들의 지질구조와 층서학에 대한 연구는 후의 석유 전문가들의 작업을 위한 건전한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참조: Trek of the Oil Finders, E.W.Owen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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