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칼럼/ 남예멘의 통일과정과 북한
에너지칼럼/ 남예멘의 통일과정과 북한
  • 한국에너지신문
  • 승인 2003.09.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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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5월 22일 남예멘의 수도 아덴에서 예멘의 통일이 전격적으로 선포되자 전세계 언론은 물론 전문가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바로 전해인 1989년까지만 하더라도 예멘의 통일이 20세기 이내에 이루어지리라 믿었던 학자나 전문가들은 거의 없었다. 1972-1979년 국경분쟁을 치른 남북 예멘은 양국의 충돌이 협상과 대화의 창구를 마련하여 1990년 통일의 초석을 마련하였다는 점은 매우 아이러니컬하다. 예멘 통일은 독일의 `흡수통일'과는 다르게 거의 대등한 관계에서 `선통합-후조정'이라는 통일 방식을 취하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
 남예멘에서 통일을 위한 개혁은 1986년 1월 13일 발생한 시민전쟁을 필두로 가속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90년 예멘 통일의 배경은 1986년 남예멘에서 발생한 내란 이전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무함마드 대통령과 그의 추종자들은 예멘사회당(YSP)이 국제관계와 특히 남북관계에서 실용적인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다. 무함마드 대통령은 북예멘의 쌀레 대통령과 개인적인 선린관계를 발전시켜온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사회당내의 강경파 비판세력들과 싸워야 했기에 남북관계의 진전은 잘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시기에 사우디아라비아는 북예멘에 대해 경제적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1986년의 남예멘의 내란은 무함마드를 무너뜨리고 그의 실용·화해 정책을 반대하는 예멘사회당내의 강경론자들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한 무함마드 대통령의 시도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알-바이드(al-Baidh)이며, 알-바이드를 정점으로 하는 아덴에서의 새로운 지도체제는 궁극적인 통일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1·13 내란은 1967년 영국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한이래 남예멘이 직면하였던 가장 심각한 정치적 위기였다. 내란은 남예멘 체제를 와해시킬 수도 있었지만, 구소련의 고르바초프 정부가 와해되기 전에 발생했기 때문에 남예멘의 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따라서 1989년 남예멘의 개혁-개방 노력은 대내적인 개혁정책이라기보다는 대외적인 변화의 물결을 잘 이용했다는 점에 문제점이 있다. 다시 말하면 철저하게 준비된 사회주의 국가의 체제전환 노력이라기보다는 1986년 발생한 1·13 내란을 수습하는 과정에 소련의 개혁-개방정책, 특히 헝가리 경제의 변화가 남예멘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소련의 붕괴로 인한 원조중단은 남예멘 개혁을 서두르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다행히도 남예멘은 개혁의 어려움을 곧바로 남북예멘의 통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러한 노력은 결실을 보아 곧바로 <통일>로 연결되었다. 국내의 정치적 안정이 어느 정도 해소되자 알-바이드 대통령은 1989년 11월 28일 아덴에서 북예멘의 쌀레 대통령과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가졌다. 남북 예멘의 정상들은 1972년이래 가장 핵심사항이었던 권력안배 문제와 일정한 과도기와 총선거를 거쳐 통일 정부를 수립한다는 통일원칙에 대타협을 이뤘다. 드디어 남북 예멘은 1990년 4월 19일-22일 북예멘의 싸나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10개항으로 이루어진 `예멘공화국 선포 및 과도기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실질적인 통일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남예멘의 개혁은 체제전환을 위한 시도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정국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남예멘 정부는 1989년 개혁 프로그램에 착수한 후 곧바로 남북정상회담에 임하여 그 다음해 통일에 이름으로써 난국을 타개할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남예멘의 개혁은 난국수습을 남북통일에 의한 권력 재창출의 수단으로 연결하기 위해 급조된 개혁 프로그램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면면은 통일이후 1994년 알-바이드에 의한 권력장악 의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으며, 급기야 이러한 상황은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1989년 남예멘의 개혁과정은 우리 한반도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체제전환이나 개혁-개방에 대해 커다란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는 북한이 개혁을 서두를 시점은 대내적인 어려움이 극에 달해 돌파구를 찾을 수 없을 경우에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만일 이러한 상황이 전개된다면, 북한도 예멘과 같이 통일이라는 수단을 염두에 두고 개혁 프로그램을 전개할 것이다. 이 경우 전제조건은 외세, 특히 중국의 변화와 궤(軌)를 같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 북한의 현실이다.
 미사일 수출의 80% 정도를 중동국가, 특히 이란과 이라크에 수출하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아프간 사태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으며, 불행히도 아시아에서 미·중의 에너지 쟁탈전이 아시아 지역에서 확대된다면, 한반도는 즉각 이의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에너지는 중국에 거의 의존하고 있으며, 에너지 비단길의 파이프라인도 북한을 통과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기에 북-미 관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최근 미국이 북한을 자극하는 이유도 바로 그 점에 있다.
 아무튼 개혁-개방에 커다란 관심을 갖지 않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대내적으로 자치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만들기보다는 대외적인 여건에 의해서 가속화 될 가능성이 짙다. 따라서 남예멘 개혁의 예는 북한의 개혁-개방과 관련하여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될 수 있다. 한국도 예멘과 마찬가지로 1972년 통일 문제에 관한 남북간 대화가 시작되었지만, "예멘은 통일을 이루었고 우리는 아직 이루지 못했다"는 결과는 북한의 태도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6자회담이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북한의 개혁-개방에 대한 태도는 크게 변화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은 남한의 의지보다는 북한의 자세에 더 의존한다고 볼 수 있다.


홍성민 소장〈중동경제연구소/hong@hopi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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