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재앙으로 가는 길
특별기고/ 재앙으로 가는 길
  • 한국에너지신문
  • 승인 2003.08.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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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미국 동부지역의 대규모 정전사태로 인해 미국에서는 현재 낙후된 전력망에 대한 반성과 함께 이같은 상황이 발생한 근본원인을 찾기 위한 노력과 분석이 한창 진행 중이다.
이런 가운데 구조개편 등 시장자유화에 있어 상당히 진보적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폴 크루그만 MIT 경제학 교수가 뉴욕 타임즈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이번 사태의 한 부분을 들여다보기로 한다.<편집자주>




 지난 목요일에 벌어진 연쇄적인 사태의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어디에 있든 간에 그동안 송전네트워크의 중요성을 무시한 결과 국지적인 문제가 대규모 사태로 확대된 것은 분명하다.
이는 이런 사태를 미리 예방할 수 있는 통제와 안전 시스템에 충분한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렇게 송전네트워크를 무시하게 된 원인은 바로 규제철폐에서 나왔다.
과거에 우리는 전력산업은 자연독점 산업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가정과 기업에 전기를 경쟁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공급 선로를 이중으로 건설하는 것은 비실용적이다.
경쟁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지역별 전력회사의 독점은 허용하되 정부는 전력회사가 고객에게 횡포를 부리지 못하게 이를 규제하게 되었다.
이런 형태의 ‘규제 속의 독점’은 발전, 송전, 배전의 전분야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전력시장 자유화(규제철폐)의 바람이 불었다.
규제철폐를 시작한 사람들은 비록 송전과 배전은 예외로 하더라도 전력산업에서 자유경쟁시장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여러 나라에서 전력회사들은 발전소 매각을 강요당했다.
사실 발전산업에서조차 효과적인 경쟁체제 실현이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졌다. 캘리포니아의 전력시장 자유화는 역사상 최악의 정책실패를 낳았다.
에너지 기업들은 전력부족을 유도해서 전기요금을 치솟게 만들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주정부는 비싼 요금을 치르고 장기계약을 체결하여 전력을 확보해야했고 이는 주정부를 빠져 나올 수 없는 상황에 몰아넣었다. 결국 전기요금을 주정부가 통제하고 있다.
사람들은 캘리포니아 사태의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사태 이후 언론은 지나친 환경규제가 이 비극의 원인이며 고의적인 전력시장 조작은 없다는 식으로 사태를 호도하고 있다.
이는 말이 안 된다. 까다로운 환경규제 때문에 캘리포니아 전력사태가 벌어졌다는 증거는 하나도 찾을 수 없다. 전력산업 자유화를 강력하게 추진한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RC)도 캘리포니아 사태의 주된 원인은 전력시장의 조작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수정주의자들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다.
전력시장의 자유화는 송전시스템 투자를 무시하게 만든다고 여러 에너지 전문가들은 경고하고 있다. 고의적인 시장조작은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과거의 규제체제 아래에서는 전력회사들이 적극적으로 송전시스템 건설과 보강에 신경을 썼다. 전력공급에 약간의 차질이라도 생기면 전력회사들은 엄청난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시장자유화가 일어나면서 전력회사들은 적극적인 송전시스템 관리 의욕을 잃어버렸다. 그 이유는 송전분야의 경쟁은 아예 불가능하고 송전시스템은 아직도 정부의 규제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반면에 송전망을 운영하는 전력회사의 수익은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에 전력회사들로서는 적극적으로 송전망을 유지보수하고 성능을 개선할 의욕을 상실했다.
또한 전력산업이 자유화되면서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졌다. 전체적인 전력공급망을 책임지고 관리할 주체가 사라졌다.
따라서 전력공급능력 향상을 높이는 것은 물론 기존 공급망을 관리하고 성능을 개선할 사람도 없게 되었다.
전력산업 자유화에 부정적인 전문가들이 무조건 시장자유화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기존 공급망을 잘 관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를 확장하고 성능을 높이는 적극적인 정책이 없이 추진되는 무조건적인 자유화는 재앙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경쟁체제가 실현되려면 독점체제 때 보다 훨씬 더 충분한 송전망이 건설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전문가들의 주장은 외면되고 있다.
정치인들과 시장자유화 예찬론자들은 전력산업을 자유화하면 시장이 무조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믿고 있다.
“현재 미국 전력산업의 현실을 놓고 볼 때, 시장자유화를 추진하면 시장이 스스로 송전망을 확충해 나간다는 생각은 재앙을 불러올 것이다”는 의견을 MIT의 폴 조스코 교수가 몇 년 전에 FERC에게 전달했다. 이 말은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이번 사태로 우리가 얻은 교훈은 무엇일까? 지금까지의 결과를 놓고 보면 시장자유화의 조짐이 좋지 않다.
부시 대통령은 “미국의 송전시스템을 현대화해야 합니다. 저는 이런 주장을 계속해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민주당이 주장한 전력시스템 개선을 위한 특별 자금지원 요구를 공화당 의원인 탐 딜레이는 “정치적으로 불순한 선동”이라고 낙인찍으며 반대했다. 불과 2년 전에 벌어진 일이다.
언론 보도를 종합해 보면 이번 정전사태에도 불구하고 부시 행정부는 공화당이 장악한 상원의 압력에 굴복하여 FERC가 제안한 송전시스템 개선 사업도 축소하고 있다고 한다. 이 정책은 이번 사태와 같은 불행을 막을 수 있는 부시 행정부의 몇 안되는 정책 가운데 하나이다.
미국은 수 십억 달러를 송전선로 개선 사업에 투자해야 한다. 근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는 수익을 높이기 위한 단순한 사업 투자가 아니므로 매우 중요한 국가 정책이 되어야 한다. 이런 희망을 아직 가지고 있다면 내가 너무 순진한가?

폴 크루그만(MIT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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