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리뷰/ 국영석유회사의 歷史(3)
에너지리뷰/ 국영석유회사의 歷史(3)
  • 한국에너지신문
  • 승인 2003.08.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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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석유 칼럼니스트

 이탈리아 또한 세계 제2차 대전 후에 상당히 복잡한 국영석유 및 가스산업을 이룩했다. 100% 국영 석유회사인 Azienda Generale Italiana del Petrolio(AGIP)은 적극적인 탐사자로서 1948년 이후에 Po Vally에서 중요한 가스지대를 개발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1953년에 국영석유 및 가스기관으로서 Ente Nazionale Idrocarburi(ENI)를 조직하고 AGIP를 탐사 및 생산회사로서 그리고 특정기능의 다른 회사들을 그 장악 하에 두게했다.
ENI는 Po Vally의 독점적 권리를 부여받았는데 물론 과거의 허가지역 몇 군데에 대해서는 그 권리를 존중해주었다.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국내 및 외국의 민간회사 및 정부지원 회사들이 계속해서 이권지역을 획득했다.
첫 번째 주요 유전은 1953년 시실리 라구사에서 Gulf Oil Corporation의 100% 자회사에 의해 발견되었고 1956년에는 AGIP에 의해 시실리 겔라에서 유전이 발견되었다. 시실리지방 정부는 1964년에 Ente Minerario Siciliano를 설립하여 이 섬 내의 석유의 탐사, 정제 및 판매에 대한 우선권을 부여했고, 신규사업이 있을 경우 이 회사가 다수 지분을 보유토록 하는 명령을 발동했다.
이러한 제한적 요소에 직면한 Gulf는 자사의 시실리 자산을 AGIP에 처분했다. 그 후에 시실리에서는 탐사활동이 감소했으나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탐사활동이 증가했는데 수많은 이탈리아 및 외국회사들이 단독으로 혹은 합작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덕분이었다.
1972년에 이탈리아의 가스생산은 140억입방미터(약 5,000억 입방피트)에 이르렀으나 석유생산은 115만톤(약 760만 배럴)에 불과했다.
AGIP은 가스의 94%를 생산했고, 석유의 99%를 생산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 ENI는 다양한 자회사들을 통해 그 활동영역을 수 개국으로 확대, 해외활동을 강화했다.
1938년 이후 브라질의 석유생산은 전적으로 국영회사인 Consehlo Nacional do Petroleo가 주도했으며 1953년 이후에는 Petroleos Brasileiro(Petrobras)에 의해 주도되었다. 브라질 국내의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기까지는 국내 및 외국의 인원과 하청업자들이 고용되었다. 광범위한 탐사활동의 결과로서 1971년 말에 육상과 해양의 누적 석유생산은 6억 4백만 배럴에 이르렀다. 그러나 엄청난 비용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고 그 후 Petrobras는 해외로 활동을 확대해 나가게 되었다.
칠레에서는 1925년 이후 정부가 모든 석유의 권리를 보유했다. 최초의 상업적 석유발견은 1945년에 이루어졌다. 정부기관들인 CORFO와 그 이후의 ENAP이 미국, 프랑스, 캐나다 전문가들의 기술적 원조로서 효과적으로 운영되었다. 1970년까지 누적생산량은 석유 1억6천만 배럴, 가스 2.4조 입방 피트로서 혹독한 자연적 제한요소 하에 이룩한 훌륭한 기록이었으나 국내수요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터키 최초의 유전은 독점적 탐사권리를 가진 정부기관인 MTA에 의해 1940년에 발견되었다. 이 유전의 상업적 생산이 어느 정도 기반을 잡은 후 1953년에 정부와 민간 터키자본이 공동 소유한 TPAO에 운영이 맡겨졌다. 그 후에 외국 회사들이 받아들여졌고 그 후의 개발은 국제석유회사들과 TPAO에 의해 거의 동등한 조건으로 행해졌다.
세계 2차 대전 후 소련의 장악 하에 놓인 몇몇 국가들에서 공산주의 스타일의 ‘인민의 석유회사’가 설립되었다. 그들은 석유 자산을 접수하고 국유화된 사유자산의 기록들을 접수했으며 대체로 소련의 원조와 기술에 의존 새로운 동기를 얻었다. 그 성과는 루마니아에서 가장 실질적인 것이었는데, 이 나라에서는 과거에 민간회사들이 능력없는 정부 때문에 심각한 곤란을 겪은 적이 있었다. 1972년 연간 생산량은 1억 400만 배럴에 달했는데, 1936년 초의 피크인 6,300백만 배럴, 세게 2차 대전 발발시의 4,500만 배럴과 비교가 될 수 있다. 40년 동안 금지되었던 가스개발은 괄목할 만하게 증대되어 갔다.
전체적인 공산주의 헤게모니 내에서 완고하게 독립상태를 유지했던 유고슬라비아는 각 구성국가들이 국영석유회사를 경영케 하는 발칸제국의 전통적 패턴을 따랐다. 모든 국영석유회사는 연방조합의 멤버들이었다. 세계대전 전의 석유개발은 하찮은 것이었으나 후에 부지런한 탐사활동의 결과 1972년에는 연간 생산량이 거의 2,300만 배럴에 이르게 되었다.
촉망받는 석유산업을 가지고 있었던 헝가리는 세계 대전의 방해를 받은 바 있으나 생산량을 상당히 확대시켰다. 알바니아는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성과를 올렸다. 기타 중부유럽 국가들에 있어서의 성과는 공산주의가 기적을 낳을 수 있음을 보여주지 못했다.
(참고: Trek of The Oil Finder, E.W.Owen)

<이승재/ sjlee44@petro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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