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리뷰/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개발史(5)
에너지리뷰/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개발史(5)
  • 한국에너지신문
  • 승인 2003.06.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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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2차 대전의 막간



 미국 내무부 장관이었으며 전쟁을 위한 석유청(PAW: Petroleum Administration For War)의 장이었던 해롤드 L. 이키스는 1943년에 정부가 설립한 석유매장량 공사(Petroleum Reserves Corporation)가 사우디아라비아의 미국 석유 회사의 자산의 소유권과 경영을 접수하라고 제의했다.
석유 매장량 공사는 1943년 11월 12일부터 1944년 1월 22일까지 중동에 사절단을 파견해서 예상되는 전시 수요를 고려해 석유매장량의 상태를 조사하게 했다. 사절단은 지질학자이며 공학 기술자인 E.드골라이어, W.E. 래더, 존 뮤렐, 그리고 PAW의 해외정제국장인 C.S.스노드그라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당시의 일일 생산량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 이란: 32만5천배럴, 이중 5만 배럴은 저유층의 잔여분으로 다시 주입
△ 이라크: 9만 배럴
△ 사우디아라비아와 바레인: 3만5천배럴
△ 쿠웨이트와 카타르: 유정 폐쇄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달았다.
`이 지역의 확인 매장량은 미국의 매장량과 비견됨. 그러나 중동 매장량 전부는 총 150개 이하의 시굴정(wildcat) 시추로 발견된 것임.
1944년 PAW는 석유 매장량 공사, 스탠다드 오일 컴파니 오브 캘리포니아, 텍사스사가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유전으로부터 지중해 연안까지 정부 소유의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는데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미국의 개인 기업들은 정부의 석유산업의 진입 제의에 적대적 입장을 가졌는데 마찬가지로 아람코도 자사의 자산 접수 제의에 적대적 입장이었다.
그러나 미국 의회는 이 제의를 거부했다.
그러자 미국과 영국 정부는 전쟁 수행을 위한 석유 공급원의 개발과 생산을 위한 국제적인 카르텔 설립에 대한 협정을 체결했다.
미국의 오일맨들과 몇몇 외국은 미국 상원이 루즈벨트 대통령과 트루먼이 제의한 이 협정을 인준하기를 거부할 때까지 이 프로젝트에 경악했다.
1945년 중 아람코는 그럭저럭 5만8천b/d 정도의 석유생산량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생산량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부분적으로 개발된 3개 유전-담맘, 아브콰이크, 콰티프-으로 부터였는데 전쟁으로 인한 로지스틱스의 핸디캡을 무릅쓰고 해낸 일이었다.
1944년에 아브콰이크에서 시추 활동이 재개되었고 1945년 6월에는 콰티프에서 새로운 유전이 발견되었다.
콰티프는 바람직한 지질구조의 지표면의 증거가 명확한 것으로 발견된 몇 안되는 장소 중 하나였는데 담맘쪽 보다는 좀 애매한 데가 있던 곳이었다.
이 구조의 시추결과 아랍구간의 연장된 배사구조 정점에서부터 6,900피트 깊이에서 생산성이 높음이 입증되었다.
캘리포니아 스탠다드는 페르샤만 라스타누라의 5만 배럴 정유공장 건설을 위한 물자조달에 최우선권을 부여받았다. 이 공장의 부분적 가동이 1945년 9월에 시작됐고 12월에 완전 가동에 들어갔다.
(참고: Trek of The Oil Finder, E.W.Owen)

<이승재 sjlee44@petro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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