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리뷰/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개발史(4)
에너지리뷰/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개발史(4)
  • 한국에너지신문
  • 승인 2003.06.2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상업적 생산의 시작


막스 스테인네크는 1936년에 최고위의 지질 전문가로 임명되어 1950년까지 이 자리를 고수했다. 그해가 바로 그가 죽기 두해전이었다.
그는 1922년부터 캘리포니아 스탠다드를 위해 일해왔고 1934년부터는 계속 아라비아에 근무했다. 지표와 공중조사 양쪽에서 매우 다양한 탐사경험을 가짐으로써 그는 이 분야에서 수준 높은 업적을 이뤘다. 그는 단편적인 증거를 통합해서 현실적인 지질학적 종합을 이루는 훌륭한 능력을 스스로 개발했다. 1936∼1941년 동안 스테인네크는 추가적으로 유망한 장소를 발견했고 관찰된 특성의 의미를 확인해 내고 주요 지질구조를 정의하는 협력 프로그램을 활성화시켰다. 당시의 탄성파 기술은 이 지역에서는 비교적 효과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력 탐사 방법은 몇 개의 가정된 배사구조의 뚜렷한 예외적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의 제의로 광범위한 구조 시추가 채택되었고 그 구조 시추가 곧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가장 강력한 석유 발견의 수단이 되었다.
초기 시추의 결과는 이 아라비아 사업에 매우 실망스런 징후를 던져주었다. 왜냐하면 담맘은 발견된 것 중 가장 매력적인 지질 구조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레인에 근접해 있었는데 이 바레인 구간은 바레인 섬에서는 생산성이 있는 것이었으나 사우디아라비아 쪽에서는 실망스런 것이었다. 그곳의 지층에서 처음에 10개의 유정이 시추되었는데 3개는 매우 작은 유정이었으며 한 개는 캠프용 가스정으로 완결되었다. 또 한 개는 수정(水井)이었으며 두 개는 포기되었고 3개는 더 깊은 시추가 예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6년에 다란에 주택지구가 건설되고 1937년 7월 최초로 미국인 부인들과 아이들을 그곳에 데려와 냉방장치가 된 작은 집에 살도록 했다. 그러나 운수는 바뀌었다. 보다 깊은 시추결과 다량의 가스가 발견되었는데 이 구간은 나중에 `아랍 구간'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그리고 담맘 7호정에서 1936년에 심충시추가 시작되었다. 이전의 바레인 구간에서 시험을 거친 이 유정은 좀 더 깊이 시추되어 1938년 3월에 아랍 포메이션(Arab Formation)의 석회암 층의 4,727피트 심도에서 대 생산정으로 완결되었다.
이 유정은 1965년까지 누적생산량이 463,872,171 배럴에 이르고 추정 궁극가채량이 55억 배럴에 이르는 등 그 생산 잠재력을 나중에 입증하게 된다.
석유를 바지선에 실어 바레인으로 나르는 작업이 1938년 9월에 개시되었고 선적시설이 육지에서 건설되었다. 라스타누라에 있는 새로운 해상 터미널에서는 1939년 5월 1일 첫 번째 탱커에 석유를 선적했으며 대축제를 열어 이 행사를 축하했다. 왕과 17명의 왕족이 이 축제에 참석했다. 짓다와 메카로부터 400대의 자동차가 도착했으며 350개의 텐트가 쳐졌고 2000명의 사람들이 며칠동안 이 행사를 축하하는 축제의 주인공들이 되었다. 짓다의 캘리포니아 스탠다드의 대표인 W.J.레난은 그 해에 추가적인 이권 취득을 위한 협상을 했다. 협상 대상은 내륙의 추가적 이권 지역과 중립 지대의 사우디 관할 지역이었다. 이렇게 해서 조사를 위해 공개된 지역은 44만 평방마일로 증가됐다.
개량된 수송 및 통신장비의 수입으로 동시적 조사 프로그램, 선별된 장소의 세부 측량, 구조 시추 그리고 특별한 관심 지역에서의 지구 물리학적 조사 등으로 광활해진 지역에서의 탐사가 수월해졌다. 상당히 정밀한 대규모 삼각 측량 네트워크가 해안 지역에서 조사되었다. 수개의 내륙 지점은 천문학적 숫자의 위치 결정 과정을 거쳐 선정되었다.
가장 확실한 유망지에서는 심층 테스트를 위한 시추가 행해졌다. 캘리포니아 스탠다드는 1937년 알 알라트와 미아콸라에서 4,500피트 심도의 실패한 시추정을 완결시켰는데 이 두 생산성이 없는 구조에서는 1969년 말까지 시추가 진행되었다. 1938년 아부 하드리아에서 1개정에 시추를 위한 보링 시설이 설치되었는데 이 유정은 1940년 3월 10,115피트 심도에서 생산정으로 완결되었다. 두 번째 정의 시추는 세계 제2차 대전으로 연기되었지만 그후의 작업 결과 추정 궁극가채량 10억 배럴의 유전으로 개발되었다. 생산은 아랍 포메이션 밑이 상부 Jurassic Jubaila 석회암층으로부터 이뤄졌다. 1940년 11월에는 애브콰이크에서 석유가 발견되었지만 세계대전은 즉각적인 개발을 방해했다. 애브콰이크는 후에 세계 최대의 유전이 하나로 확인되었는데 그 궁극가채량은 120억 배럴로 추정되었다.
가와르 구조의 거대한 범위가 1941년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라드 지역의 소규모 에오세 암층의 노출부분에서 세부적 측량이 이뤄졌음에도 분명한 막다른 지점에 봉착하게 되었다. 하라드와 아인다르 사이의 125마일 거리를 따라 지표면 측량이 이뤄졌으나 소규모 불규칙한 구조가 드러났을 뿐이었다. 그러나 넓게 간격을 둔 구조의 유정들은 대규모 배사습곡의 축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중력조사는 이 지형의 북부에서 실시되었다. 세계 대전이 탐사활동을 방해하기 까지 사우디아라비아에서의 예비조사는 17만5천 평방마일에 이르렀고 5만 평방마일이 상당히 세부적으로 측정되었다. 상당한 지역이 구조 시추와 중력계와 지진계로 탐사되었다.
지질 전문가들은 이 나라의 광대한 석유 매장량의 주요 부분을 내포하고 있는 구조들의 위치, 범위 등을 결정했으며 그 외 다수의 유망지를 발견했는데 이 유망지는 나중에 평가된다.
Gester는 1951년에 발간한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매장량의 보다 큰 부분이 발견된 것은 막스 스테인네크의 조사와 지질 조사 현장에서 보여준 선견지명, 낙관주의, 집요함 그리고 우애있는 리더쉽 덕분이었다 이 지역에서 그가 개발한 방법은 다른 어떤 지질 전문가도 해낼 수 없는 엄청난 발견으로 결과한 것이다.'
(참고: Trek of The Oil Finder, E.W.Owen)

<이승재/ sjlee44@petronet.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