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리뷰/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개발史(3)
에너지리뷰/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개발史(3)
  • 한국에너지신문
  • 승인 2003.06.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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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의 지질탐사



미국 지질학자들이 최초로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되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트윗첼은 1933년 9월초에 바레인으로 가서 준비작업을 돕기로 했다. 로버트 P.`버트' 밀러는 1932년 4월에 바레인으로 왔는데 지질조사팀을 이끌게 되었다. 그와 바레인에 1년가량 있었던 슈일러 B. `크루그' 헨리는 틔윗첼과 함께 1933년 9월 23일 주바일에 상륙했다. 그들은 캘리포니아 스탠다드의 대리점인 고사이비 형제 상회의 현지 상업지구에 임시 본부를 설치하고 관습적인 절차를 마무리하는 한편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한 다음 곧 현장으로 갔다. 그들은 바레인에서도 보이는 제벨 다린의 석회석 구릉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즉시 바람직한 지질구조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담맘돔이'라고 명명했다.
J.W. `소우크' 후버가 1월에 오자이르 항을 통해서 도착했다. 그와 헨리는 담맘 돔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추가적으로 다른 지질 전문가들-아트 브라운, 토마스 W.코흐, 휴 L.버취필 등-이 11월에 도착한 후에 밀러는 호푸프에 지부를 설치했는데 오지의 신속한 조사를 위해 보다 편리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바레인의 이권 지역을 조사한 바 있는 공학자이며 아라비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앨런화이트가 호푸프 사무소를 관리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현강 팀이 수집한 데이터를 백지도에 옮겨 놓았다.
첫 번째 조사 시즌 동안에 사막의 광대한 면적이 조사되었다. 주바일에서 내륙 150마일에 있는 캠프로부터 아주 멀리까지 사막을 침투해 들어갔던 것이다.
이 작업의 현장팀은 두명의 지질 전문가, 한명이 통역, 요리사, 요리사 조수, 잡일꾼, 기계공, 기계공 조수, 트럭 운전사 4명의 닉타 솔이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10∼30명의 경호 및 안내를 받았는데 이들 경호원들과 안내자들은 사우디 아라비아 정부가 파견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한 대의 포드 투어링 카, 픽업 트럭 한 대, 승용 낙타 25마리, 짐 낙타 12마리를 가지고 있었다. 장비로는 3착의 염소털 텐트, 1착의 실크텐트, 풀로 만든 깔개, 조립식 가구, 요리도구, 가솔린 난로, 가솔린 등불, 연장, 부품, 5캘런 짜리 양철통의 가솔린 보급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현재 베도윈 족 들에게 이상한 무리로 보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페어차일드 비행기가 1934년 3월 초에 이곳에 도착했는데 이 비행기에는 파일럿이자 항공사진사, 지질전문가인 리챠트 C. 커와 파일럿이며 기계공인 챨스 로크 빌이 타고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공중 조사를 위한 비행기 사용을 3월 30일에 승인했고 지질 전문가들이 관찰을 위해 탑승해서 수차례 비행을 했다. 커는 담맘돔의 사진을 찍는 한편 헨리라 후버는 지질의 상세 조사를 마치고 테스트를 위해 한 장소에 막대기를 세워 표시를 했다. 조사 시즌은 6월 6일에 끝났다.
캘리포니아 스탠다드시는 1934년 담맘돔을 테스트하기로 결정하고 11월에 작업 그룹을 파견했는데 이 그룹은 시추 감독인 가이 S. 윌리암스와 석유 공학자인 풀로이드 W. 올라이리가 이끌었다. 1935년 4월에 유정을 파기 위해 담맘 1호정에 보정 시설이 설치되었으며 3,203 피트 깊이까지 시추해서 얼마간의 석유 징후를 발견했으나 상업적인 것이 못되었다. 두 번째 테스트를 위한 시추가 1936년 2월에 이 돔에서 시작되었다.
밀러는 1935년 가을까지 상임 지배인으로 있었고 이 자리는 프레드 A. 데이비스에게 인계되었다. 올라이거는 1937년에 상임 지배인이 되었고 그 후 총 지배인으로 임명되었다.
지질조사 그룹은 1934년과 1935년에 증원되었다. 그들은 엄청난 작업량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광대한 황무지를 목적없이 허울대며 돌아다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권 지역의 대부분은 동향으로 움푹 들어간 고대와 잡석이나 모래로 뒤덮힌 평원에 의해 점유되고 있었는데 간간히 물기가 빠진 강바닥으로 끊겨 있었고 해안 가까이에 있는 지역은 염분이 뒤덮힌 평지로 끊기고는 했다. 가까스로 노출된 표면의 지질구조는 마이오세-플라이오세의 사암질의 이회토와 세일과 사암이 섞인 사암질의 석회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탄산염이 풍부한 지층은 낮은 구릉과 꼭대기는 평평한 바위 언덕이고 주위는 벼랑인 지형을 덮고 있는 저항 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형 측량결과 지질구조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이 지형은 남쪽으로 Rubal Khali, 즉 `공백의 구역'의 광대한 모래언덕에 합쳐지게 되어 있었다. 극서쪽으로는 Arabian Shield의 측면 위에 있는 오래된 암석들의 노두가 지표면 이하 부문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었다. 길고 뜨거운 여름과 강우량이 희박한 점 등은 마르고 강인한 풀과 초목들의 관목과 빈약한 수풀이 존재할 수밖에 없게 했으며 사람의 그림자라곤 찾아보기 힘들게 만들었다.
1934∼1935년 조사 시즌에 상당한 조사가 이뤄졌다. 담맘 북서 지역에서는 콰티프에서 약간의 지질구조적 증거가 발견되었고 아부 하드리야의 공중으로부터 단층에 징조가 관찰되었다. 그밖에 막스 스타인네크 외 톰 코흐는 하브콰이크와 알 알라트의 모래에서 에오세 암석의 노출을 발견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애매한 프로스펙트으로는 결국 3개의 자이언트 유전의 장소로서 나중에 알려지게 된다. En Nala 배사구조의 첫 번째 실마리, 즉 세계 최대의 유전인 Ghawar 유전이 숨겨진 구조의 실마리가 한 고대에서 1935년에 마침내 발견되게 되는 것이다.
〈Edgar Wesley Owen 著 `Trek of the Oil Finders: a histing of exploration for Petroleum〉

<이승재 칼럼니스트/ sjlee44@petro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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