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리뷰/ 영국 해협에서 실종한 디젤의 현란했던 생애
에너지리뷰/ 영국 해협에서 실종한 디젤의 현란했던 생애
  • 한국에너지신문
  • 승인 2003.0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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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주의자 루돌프 디젤(Rudolf Diesel)이 세계 평화안으로 `Black Mistress(검은 여왕)'를 제시했을 때 그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디젤 엔진 연구에 몰두하던 1888년 어느날 연료로서 실험하는 암모니아 가스가 폭발해서 그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 때 그는 어떤 전쟁 억제 수단을 상상해냈다. 그리고는 쉽게 깨질 수 있는 유리병에 접촉하면 폭발하는 가스를 넣어 군대에 공급해서 치명적인 폭탄이나 총탄 대신 사용할 것을 제의했다.
이를 사용하면 모든 전투를 가짜로 만들 수 있는 일면 경쟁적 소동에 흥청대는 전쟁 바보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다는게 그의 주장이었다.
프랑스 특허국이 이를 거절하자 그는 독일 제국 파리 총영사인 게오르그 뮌스터 백작을 찾아갔다. 웃는 일이 극히 드물었던 백작은 소리내어 웃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 30의 디젤이 내놓은 이 평화안이 경시되지 않았던 데는 그의 학자적 캐리어가 현란했다는 점에 있었다.
디젤 엔진 발명으로 유명한 그는 저명한 열공학자였으며 미술품 감정가였고, 언어학자, 사회이론가였다. 1인 창조의 디젤의 세계는 순수한 일면 사회적인 미술과 과학, 기술공학 및 발명의 창조적 어용론 집합소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예술에 대한 그의 태도를 `행운의 버섯 우산'이라고 했고 발명가로서의 자신의 캐리어를 `절망과 황홀경으로의 노예화'라고 표현했으며 평화에 대한 자신의 운동을 `하찮고 편견 가득한 국수주의의 장기적 희생으로 인한 완고한 변절'이라고 말햇다.
그는 1858년 3월18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독일 바바리아에서 이민 온 피혁 기술자인 아버지와 독일 태생의 가정교사인 어머니의 외아들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최우등생이었다. 그러나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이 터지자 디젤 가족은 이방인으로 분류되어 런던의 중립 보호시설에 수용되었다. 다행히 디젤은 교사를 하던 사촌형의 도움으로 빈궁한 상태에서 벗어나 독일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때도 그는 최우등을 놓치지 않았다. 이 무렵 그는 가정교사를 해서 번 돈을 모아 피아노를 빌려 레슨을 받았고 성악 레슨도 받았다. 오페라, 콘서트, 미술 전람회에도 가고 강의도 들었다. 졸업 후 그는 스위스의 한 공장에서 기계공과 부품 설계사로 일했다.
그러나 그는 파리로 다시 복귀했고 미술계의 저명인사들과 사귀게 되었다. 상류층 사교계 인사들과도 교류했다. 그 때 그는 냉동기회사 직원이었다. 그는 25살에 결혼,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 후 13년간은 그 유명한 디젤 엔진을 발명하기 위한 시련의 기간이었다.
디젤 엔진이란 실린더 내에 공기를 흡입, 압축해서 고온 고압으로 하고, 여기에 액체 연료를 분사하여 자연 발화시켜 피스톤을 작동시킴으로써 동력을 얻는 내연기관이다. 디젤은 처음 중유를 사용했으나 회전 수의 증가 등 그 개량이 진전됨에 따라서 착화성이 양호한 경유를 사용했다.
1893년 8월 3일 디젤은 아우그스부르그에서 디젤 엔진의 기본 모델을 만들었고 그 후 그것을 개량해 나갔다. 1898년까지 디젤은 독점 수수료로부터 얻은 수익으로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 수수료의 대부분은 외국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디젤이 엘리트 강연자로서 처음으로 미국을 여행했던 1904년에 그는 예전의 빈궁한 상태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의 돈 관리가 소름끼칠 정도로 나빴기 때문이었다. 사회 철학에 대한 두권의 책을 발간했지만 그의 재정적 어려움을 완화시켜줄 수 없었다. 그러나 디젤은 동력시대의 탁월한 개척자로서 미술의 옹호자로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의 엔진은 파이프라인, 발전소, 자동차, 트럭, 선박 등에 사용되었고 광산, 유전, 공장 등에도 이용되었다. 그러나 1912년 미국 여행중에 그의 건강은 몹시 나빠져 있었다. 그는 통풍을 앓았고 세계 제 1차 대전의 발발 직전의 여러 상황 때문에 정서적으로 매우 혼란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생애 최상의 시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뮌헨으로 돌아왔을 때 세명의 손자들이 그를 반겨주었고 그의 엔진을 채택하겠다는 제의가 홍수처럼 밀려왔고 뮌헨 오페라가 다시 문을 열었으며 그의 아내가 그를 위해 마련한 미술 전람회도 개최되었다.
1913년 9월 27일 그는 짧은 여행을 위해 런던으로 출발했다. 거기에서 그는 공학자들 회의에서 환영을 받게 되어 있었다. 두 번째 날 저녁에 그는 페리선에 올라 영국으로 향했다. 공학 부문의 오랜 친구가 동승해 있었다. 그는 그 친구와 함께 즐겁게 만찬을 들었다.
그날 밤 늦게 그의 특별실과 짐은 여전히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는데 디젤은 해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그가 영국해협에서 익사했으리라 추측했다.

<이승재/ sjlee44@petro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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