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리뷰/ 로건의 배사구조
에너지리뷰/ 로건의 배사구조
  • 한국에너지신문
  • 승인 2002.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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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의 사행연귀(四行聯句)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기원전 4∼3세기에 골人(프랑스인)들은 가히 대재앙이라고 불릴만한 전쟁을 벌였다. 그들은 먼전 BC 390년에 로마를 침략했다. 로마는 그 당시 서구 세계의 문명제국이었다. 그리고 나서 BC 279년에 그들은 그리스를 침략하고 계속해서 아시아쪽으로 진군했다. 이들은 거의 반세기 동안이나 이들 지역을 능욕한 셈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소아시아의 갈라티아란 지역에 정착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툴루즈 사람들은 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전설을 믿고 있는 것이다. 세계를 뒤흔든 그 믿을 수 없는 전쟁을 벌인 사람은 툴루즈의 볼깨-텍또우쥬라는 사람이며 그의 군대가 돌아올 때 고전 세계 두 국가의 왕으로부터 약탈물과 보물을 가지고 툴루즈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툴루즈 지역 전설에 의하면 그들은 침략 중에 델피의 아폴로 신탁소에 손상을 입혔는데, 이 신탁소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귀중하게 여기고 신성시 되던 권력의 중심이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툴루즈에서 무시무시한 역병이 휩쓸었다. 신성모독에 대한 보복이었다. 이는 델피의 신탁소의 툴루즈 지역 신탁소라 할 수 있는 지역 신탁소에서 확인된 것이었다.
지역 신탁소는 역병이 그들이 약탈한 모든 보물을 성스러운 호수에 던져넣기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전했는데 성스러운 호수가 어디 있는지는 확실히 하지 않았다. 최근의 몇몇 학자들은 이 성스러운 호수가 단순히 땅의 구멍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지만 현재까지 이를 확실히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이 보물찾기에 나섰다. 보물이 있으면 찾아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구에 석유라는 보물이 있으면 당연히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19세기부터 석유라는 보물찾기에 과학적 접근이 시도되기 시작했다.
사실 석유탐사에 있어서 과학적인 이론이 탐구되기 시작한 것은 드레이크의 석유 발견 훨씬 전의 일이었다. 어쨌든 석유탐사의 과학적 접근은 배사구조의 원리를 발견한 것이 시초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지의 석유 매장량의 절반 정도를 가지고 있다는 지질구조인 배사구조 이론은 어떻게 발견되었는가? 1831년 봄, 윌리엄 E. 로건이라는 한 젊은 캐나다인이 구리 제련의 세세한 과정을 배우고자 영국 웨일즈의 광산으로 갔다. 그의 친척 하나가 그 광산에 약간의 투자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로건은 런던에서 학교에 다니면서 삼촌의 회계 사무소에서 일하던 중이었다. 그는 지질학, 아니 과학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가 받은 교육은 고전과 예술에 관한 것이었다. 웨일즈에서 일자리를 잡은 그는 그의 형인 헨리에게 편지를 써서 그의 트렁크에다 헌옷가지, 광물학과 지질학에 대한 좋은 책 몇 권, 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그의 플륫을 넣어 보내달라고 했다.
웨일즈로 간지 몇 년 후 로건은 석탄이 이동하는 물질의 축적이 아니라 발견된 그 위치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증거를 찾아내게 되었는데 이로써 오랫동안 지질학자들이 골머리를 앓던 문제가 해결된 셈이었다. 그는 캐나다 여행 중에 앨버타의 석탄으로부터 등유를 만들어낸 게스너 박사를 만날 희망을 갖고 뉴브런즈웍주의 세이트 존으로 갔다. 그가 집에 없음을 안 로건은 펀디만을 건너 노바 스코티아주의 윈저로 갔다. 그는 선창가에서 건축용 돌무더기를 보고 나서 그것들의 여러 가지 깎인 면들을 조사했다. 그 때 그는 어떤 돌조각에서 동물의 발자국과 비슷한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가 돌무더기의 원산지를 수소문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알아본 결과 그 돌들은 그곳에서 15마일 떨어진 호튼 블러프에서 생산된 것이었다. 이러한 발견은 그후 20년 후에야 인정을 받았으나 당시로서도 지질학적 사고의 혁명을 일으켜 지질학의 프로나 아마 모두를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실 로건은 프로와 아마의 양다리를 걸친 사람이었다. 그 돌들의 근원은 석탄층 바로 밑의 지층이었으며 동물의 발자국은 양서류의 것이었다. 지층과 발자국의 이러한 일치는 파충류가 당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전에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자신의 지적인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선창가의 돌무더기로부터 어떤 사실을 캐려 애쓰고, 그의 가설을 시험하기 위하여 여행을 했던 로건, 그 사람은 그가 가는 곳마다 신기하고 놀라운 일을 발견하도록 예정지어진 사람이었다. 로건이 캐나다 지질 조사국의 최초의 국장으로서 임명된 뒤에 당연히 지질학계에서는 그 지위에 합당하게 놀라운 발견을 해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로건은 과연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로건의 중요한 발견은 순전히 우연스런 상태에서 발견된 것이었고 로건 자신도 그 발견을 무관심하게 발표하고는 했다. 그 발견을 이기적으로 이용하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다른 사람의 몫이었던 것이다.
1843년과 1844년에 로건은 가스페만 지역을 연구하며 시간을 보냈다. 캐나다 정부가 석탄의 매장지를 발견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캐나다의 그쪽 부분에 석탄이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로건은 우연히 그곳에 석유 유정이 있다는 보고를 접했는데 그는 마침내 가스페만 근처에서 두 개의 유정을 발견해냈다.
그가 관찰해본 결과 지층의 암석은 완만한 기복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지질학적 용어를 사용하자면 배사구조로 되어 있었다. 석유가 있는 곳은 주로 이들 배사구조의 축 부분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이것은 배사구조의 작용이나 석유매장의 구조적인 면을 관찰한 최초의 공식적 기록으로 기억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이론이 분명히 공식화된 것은 이로부터 18년 후의 일이었다. 이를 공식화한 사람은 로건이 국장 시절에 조사국의 화학자였던 캐나다인 토머스 스터리 헌트였다. 같은 시기에 미국과 스코틀랜드의 지질학자들이 이 이론을 지지하고 나섰다. 배사구조에 석유가 있다는 이러한 발견은 석유 탐사에 있어서 과학적 접근의 제일보였다고 할 수 있다.
 (Samuel w. Tait, Jr. 著 The Wildcatters 참조)

<이승재 칼럼니스트sjlee44@petro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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