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리뷰/ 異說, 시추에 의한 석유생산은 드레이크가 최초가 아니었다
에너지리뷰/ 異說, 시추에 의한 석유생산은 드레이크가 최초가 아니었다
  • 한국에너지신문
  • 승인 2002.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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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서양에서는 고래 기름으로 등불을 밝혔다. 그러나 고래기름의 공급원이 핍박해지자 사람들은 대체물질을 찾아나섰다.  이 과정에서 온갖 화학적 지식이 동원되었다. 알코올과 송진에서 채취한 테레핀유를 합성한 캄펜이란 광원(光源)이 개발되는가 하면 석탄으로부터 석유를 채취하는 방법이 모색되었다. 주목할 것은 이 석탄에서 석유를 채취하는 것이다. 이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19세기 스코틀랜드 사람인 제임스 영이었다. 한편 같은 시대에 아메리카쪽에서는 노바 스코티아 사람인 아브라함 게스너가 기름과 가스를 다량으로 함유한 촉탄이란 것에서 석유를 채취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이 무렵에 트리니대드에 역청지역이 발견되고, 이를 증류하여 석유를 채취하는 방법으로 진일보하는 발전을 가져왔다. 미국 내에서도 이 역청지역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아시다시피 이 역청은 지하의 석유가 지표로 나와 굳어진 것이다.
이 역청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제기하고자 하는 이설의 주인공인 J.H. 윌리암스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캐나다 온타리오주 하밀톤에 살고 있었던 그는 제임스 영이 이룬 업적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었고, 그 자신이 스코틀랜드산 석탄을 증류하는 실험과 루마니아에서 발견된 역청에서 석유를 정제해내는 작업을 한 바 있었다. 1857년에 그는 역청이 많이 있는 블랙 크리이크로 가서 다음 해에 근처 숲속에 등화용 기름을 만드는 조그만 정유공장을 세웠다. 윌리암스가 정유공장을 가동하기 전에 석유를 시추에 의해 파내기 전부터 석유를 시장에 공급하던 상인인 A.C. 페리스란 사람이 윌리암스를 방문해 그의 땅을 매입하려 했다. 이러한 일은 윌리암스로 하여금 용기를 북돋우는 자극제가 되어 석유 생산량을 두배로 올리게 하였다. 그는 역청지역에 4평방피트의 구덩이를 파서 40∼60피트 깊이에서 중질원유(重質原油)가 고여 있는 자갈층을 발견하고 그 원유를 펌프로 퍼올렸다.
이러한 사실은 중요한 것이다. 윌리암스는 석유 역사상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을 못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셈이 되니까 말이다.
사실 윌리암스는 오늘날의 용어로 말해서 석유 사상 최초의 메이저 오퍼레이터(major operator)였다. 그는 석유를 생산해서 정제하고 판매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 보다 더 혁명적인 그 무엇인가를 이 사건은 내포하고 있었다. 1861년 가을에 온타리오주 남서부에서는 오일 붐이 일었다. 캐나다 신문인 토론토 글로브지의 사주는 이 오일붐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특파원을 파견해 현지 사정을 알아보게 했다. 문제는 그 특파원이 보내온 1961년 8월 29일자 리포트 속에 아래와 같은 글이 적혀있었던 것이다.

윌림암스 회사 27호정. 소유주 윌리암스
시추 심도 100ft. 평균 생산량 60b/d
막대한 양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음.
약 2년 동안 생산해온 유정임.

그렇다. 2년동안 생산해온 유정인 것이다. 이 말은 윌리암스가 꼭 2년 전인 1859년 8월 29일 석유 시추정을 성공적으로 완결지었다는 말이 된다. 드레이크보다 이틀이 늦은 것이다. 게다가 그 특파원이 대충 2년 전부터라고 쓴 말은 실은 그보다 훨씬 전에 석유를 시추해서 발견했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 사실 J.H. 윌리암스는 북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시추를 통해 석유를 발견한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석유의 역사는 드레이크쪽에 손을 들어 주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석유사의 초기에도 이렇게 내재되어 석유 연구가들을 흥미진진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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