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리뷰/ 방랑, 그 Cosmology
에너지리뷰/ 방랑, 그 Cosmology
  • 한국에너지신문
  • 승인 2002.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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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밀러는 자전적 소설로서 솔직성(특히 성에 대한)을 성취하고 20세기 문학에 영향을 준 작가이자 영원한 보헤미안이다. 자유를 통한 자기 실현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작품의 개인주의적 무정부적 성향은 19세기 낭만주의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그는 자유롭고 편한 미국 스타일인 일면, 남이 숨기는 것에 기꺼이 들어가 보고 선과 함께 악을 열심히 받아들이는데서 오는 코미디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의 성적인 솔직성으로 해서 그의 작품들은 영국과 미국에서 1960년대까지 판금되다가-물론 파리로부터의 밀수본이 유행했다-외설논쟁을 불러 일으키며 1964년 대법원의 판결로 출판금지가 해제되었다.
1930년에 파리로 간 그는 하루살이의 빈궁한 공황기를 경과하며 `북회귀선'을 썼다. 대담한 성 묘사가 있는가 하면 단번에 철학적 명상으로 비약하는 것이었다. 파리라는 하나의 세계, 그것도 창녀들의 세계를 전전한 그의 보헤미안적 방랑의 목표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나중에 그를 숭배하는 무리들이 그의 주위를 떠나지 않게 했을까? `북회귀선'에는 이런 희화가 등장한다.
`졸고 있다. 사랑의 생리학. 고래는 발기하지 않을 때 6피트의 페니스를 가지고 있다. 박쥐-얽매이지 않은 페니스. 동물은 페니스 속에 뼈가 있다. 인간에게선 그 뼈가 상실되었다. 인간이 뼈를 가진 페니스를 가지고 돌아다닌다고 상상해 보라. 캥거루는 두 개의 페니스가 있다. 하나는 주중용, 또 하나는 휴일용.' 중요한 것은 파리의 창녀 세계를 전전한 헨리 밀러는 실은 우주의 방랑자였다는 사실이다. 그의 방랑엔 우주를 쫓아가는 천박하지 않은 추적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똑같은 방랑의 성격을, 드레이크 유정 이후 미국 내에 갑자기 수많은 무리가 지어진 oil hunter들에게서도 발견할 수가 있다. oil hunter의 성격은 호기심에 가득하고, 본래적인 휴식없음, 탐구의 애착, 이득의 동기 등으로 규정할 수 있지만 미국 내를 휘돌던 이 무리들은 우주의 방랑자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우주에서 무엇을 찾았을까? 단순히 석유라고는 할 수 없다. 그들은 돈보다 발견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했으니까 말이다.
`편재하는 존 갤리(ubiquitous John Galey)'는 이들 무리의 전형이라 할 수 있었다.
갤리는 진짜 석유탐사꾼이었다. 후에 갤리의 한 동업자는 갤리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석유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고 회고했다.
갤리는 석유를 찾는데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지질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는 하지만 그 능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에게는 석유 냄새를 맡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라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그는 지칠줄 몰랐으며 떠들썩하지 않게 석유탐사를 계속했다. 석유라는 보물을 찾는 작업은 그에게는 보물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 그의 동업자는 제임스 구피였다. 그래서 당시 흔히 `구피와 갤리'라는 유명한 단짝을 이루었다.
그런데 제임스 구피는 훨씬 화려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정치인이었다.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위한 쇼로서 유정의 불을 15분 동안 태우기 위해 펜실베니아 유한 회사를 소유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의 한 석유 관련 잡지는 다음과 같이 그를 평했다.
`그의 사업 스타일은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급행열차나 비행기를 타고 다닐 수 있는 곳에 결코 보통 열차를 타고 가지는 못할 성격의 소유자다.' 1880년대 중엽에 천연가스가 돈이 된다는 말이 나돌았다. 너도나도 천연가스를 찾아나섰다. 모험적 정신의 소유자라면 모두 천연가스 탐사에 관심을 가질 정도였다.
그 중에 한 사람, 미국 동부 클래리온 군 출신의 젊은이 존 갤리도 가스를 찾아나섰다. 그는 베난고 군에서 그의 첫 번째 유정을 시추한 경험이 있었다.
1891년에 그는 제임스 구피 등 동업자들과 천연가스 탐사를 시작했는데, 이는 카네기의 제철소와 웨스팅하우스에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천연가스가 나오는 유정을 발견했으나 얼마되지 않아 스탠다드 오일사에 매각해 버렸다.
그는 동부에 너무 많은 석유발견이 있었고 너무 많이 개발되어 그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캔사스주로 갔다. 거기서 그는 석유를 발견했다. 미국 중부에서는 중요한 석유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팔아버리고 남서쪽으로 oil hunting을 계속해나갔다.
그에게는 발견만이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그는 구피와 함께 파틸로 히긴스가 발견한 스핀들 탑 유정개발에 참여했으나 이 유정의 생산량이 감소함으로써 석유 탐사의 귀재라는 그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몰락해서 불운한 노년을 보내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미국 석유개발사에 있어서 그의 oil hunting, 즉 방랑은 두고 두고 얘기거리가 되고 있다.

<이승재 칼럼니스트/ sjlee44@petro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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