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LPG 보급확대와 유통구조개선
80년대 LPG 보급확대와 유통구조개선
  • 한국에너지
  • 승인 2002.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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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서 설명한 대로 80년대 초까지 정우에너지(주)는 LPG도입사업의 준비를 마무리하였다. 즉 사우디와 장기공급계약 체결, 인수기지는 지하저장방식 채택, 건설자금은 국민투자기금으로 충당키로 하고 81년 7월 여수의 인수(1차)기지와 인천의 분배(2차)기지 건설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LPG의 “대량공급”이라는 상류(上流)부문만의 준비일 뿐 “보급확대”를 위하여 따로 하류(下流)부문의 준비가 필요하였다.
81년 우리나라 가스수요는 도시가스가 겨우 13만가구에 22백만m³(10,500kcal/m³ 기준)이고, LPG가 78만 가구 및 택시 2만5천대(총 6만6천대중 LPG사용차)에 43만톤이었다. LPG의 수요를 촉진하려면 가스가격인하, 유통망확충, 가스기기보급 등이 필수적이었다.
82년 2월 사우디로부터 대형 냉동원양선편으로 값싼 LPG가 여수항에 정박중인 선상저장시설(Floating storage)을 거쳐 공급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정부는 국내 LPG 판매가격을 10%씩 두 차례 인하하는 한편 LPG택시의 정수제를 해제하였다. 충전소 출고가격(세포함)은 82년 3월, 83년 2월에 각각 프로판이 812에서 726, 646원/kg, 부탄이 805에서 720, 640원/kg으로 내렸다.
 그 결과 LPG의 가정상업용 수요가 급증하고, 택시는 전부 LPG로 전환되고, 도시가스사업은 값싼 원료의 충분한 공급으로 LPG-공기식으로 활성화하였다. 한편 LPG유통업계는 유통망 확충에, 가스기기업계는 가스레인지, 오븐 등 편리한 연소기기 보급에 노력하였다. 특히 정우에너지는 저조했던 가스보일러의 보급에 앞장서 단독주택은 물론 아파트에서도 중앙집중식 중유보일러 대신 개별적으로 다용도실에 작은 가스보일러를 설치하는 것이 편리하고 경제적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도시가스사업은 87년부터 평택기지에서 LNG가 공급되자 수도권에서 원료전환이 일어나면서 더욱 활기를 띄었고, 가스보일러는 도시가스용과 LPG용을 통틀어 ’92년까지 누계 약100만대가 보급되어 `가스난방' 시대가 시작되었다.
정우에너지(주)는 83년 7월 2년만에 29만m³의 지하저장공동(空洞: Cavern)을 갖춘 여수 인수기지를 500억원의 투자비로 준공하였다. 결국 지하저장방식을 채택한 김봉완 사장의 과감한 결단으로 당초 24만m³의 지상저장탱크로 800억원을 투자하려던 계획에 비하여 엄청난 투자비 절감은 물론 소요 토지면적 감소, 운영비와 보수비 절감, 안전 향상 등 여러 가지 장점을 가져왔다. 이 선례를 따라 이후 우리나라에 건설된 LPG 인수기지는 모두 지하저장방식을 채택하게 되었다.
동사는 82년부터 3년간 100여만톤의 LPG를 순조로이 국내에 도입, 판매하였다. 한편 김사장은 일본 LPG산업계 인사로부터 그들의 유통구조는 너무 낙후되었으니 한국은 규모가 작을 때 아예 유럽방식을 본받으라는 충고를 받은 터라 기지준공 후 곧 국내 유통구조개선을 위하여 유럽 LPG산업계의 실태조사를 명하였다. 필자는 여러 번 영국의 Calor Gas, 프랑스의 Butagaz, 덴마크의 Kosan사 등 전문 LPG판매사를 방문하고, 또 그들 전문가를 우리나라로 초청하여 유통구조의 개선점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그 결과 수요개발과 안전향상을 위하여 스몰벌크(Small bulk) 공급방식, 대형 자동용기충전소, 캐비넷히터(이동식 부탄히터) 등의 도입을 적극 검토했지만 당시에는 어느 것도 실현시키지 못하였다.
정우에너지(주)는 모회사인 정우개발(주)의 부실화로 84년 호남정유(현 LG-Cltex정유)측에 양도되어 여수에너지가 되었다. 동사는 호남정유를 대주주로 하고 다른 정유4사가 함께 참여하는 제1 공동수입사로 뒤에 사명이 다시 호유에너지와 LG가스로 바뀌었다.
80년대에 국내 LPG시장은 수요의 급성장에 비하여 생산량의 완만한 증가로 수입소요량이 급증하였다. 이런 사정에서 국내 제1의 LPG 판매시장을 가진 유공(현 SK)도 LPG도입사업을 적극 추진하여 85년말 동사를 대주주로 하는 제2 공동수입사인 유공가스(현 SK가스)를 창설하였다. 이어 2년간 울산인수기지를 건설하고 87년말 LPG도입을 개시함으로써 88년부터 우리나라의 LPG수입은 LG가스와 SK가스 양사의 경쟁체제로 바뀌었다.
정우에서 유공으로 자리를 옮긴 필자는 85년부터 5년여 동안 유공가스의 초대 전무이사로 서효중(徐孝重)사장을 모시고 사업계획 수립, 회사설립, 기지건설, LPG도입, 영업망구축 등을 지휘하였다. 50만m³의 지하저장시설을 갖춘 울산 인수기지 건설에는 670억원이 소요되었다. 또 직원들을 유럽의 Calor Gas와 Totalgaz 등 전문 LPG판매사에서 연수시키는 한편 관계당국을 꾸준히 설득하여 부탄용기의 실내반입이 가능하도록 관련법규를 개정하고 89년부터 캐비넷히터의 판매를 개시하였다.
필자가 유럽을 본받아 추진하려던 유통구조 개선사업은 그 뒤에 일부만 실현되었다. 즉 캐비넷히터는 차츰 편리하고 안전한 보조 난방기구로 알려져 92년까지 수십만대, 현재까지 거의 2백만대가 보급되었고, 스몰벌크방식은 원격지 아파트 등에 대한 집단공급을 위하여 90년대에야 상당히 보급된 반면 대형 자동용기충전소는 기존업계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결국 82년 대량도입 개시부터 92년까지 10년간 LPG시장은 놀라운 성장세를 지속하였다. 값싸고 풍부한 LPG 공급은 가정^상업용 연료(프로판), 택시연료(부탄), 산업용 연료 등의 수요를 급신장시키고 도시가스의 주원료로 그 놀라운 확대보급을 뒷받침하였다. 또 새로 화학원료용 수요도 생겨났다. 다만 도시가스의 원료는 LPG가 유일하게 사용되다가 87년 LNG 도입개시 이후 먼저 수도권, 뒤에 전국으로 배관망이 확장됨에 따라 현재까지 대부분 LNG로 대체되었다.
다음 표는 그 기간의 급성장을 숫자로 보여준다. 수요는 456만톤으로 7.2배, 생산은 130만톤으로 3배, 수입은 250만톤으로 무려 15배로 급증하였다.  수용가는 97만에서 946만 가구, 유통되는 LPG용기는 1.7백만에서 13.8백만개, 택시(LPG사용)는 6만에서 19만대로 급증하였다. 다만 충전소(용기와 자동차)는 321에서 513개소로 약간 늘어 규모가 커졌음을 알 수 있다. 92년까지 도시가스는 소비량 21억m³, 수요가 215만 가구로 급성장했고, 그 원료는 LPG와 LNG가 1/4과 3/4이었다.

<김태문 가스학회 고문 designtimesp=11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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