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리뷰/ 니콜라이 바이바코프(4)
에너지리뷰/ 니콜라이 바이바코프(4)
  • 한국에너지신문
  • 승인 2002.10.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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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바코프와 그의 팀은 유전시설 파괴작업을 훌륭하게 해냈다. 마이콥프의 유정들은 독일군의 손에 들어갔으나 그 유정들은 이미 불타고 있었다.
크라스노다르와 아르마비르의 정유공장들의 생산시설은 파괴되어 있었다. 연결 파이프라인도 파괴되어 그로즈니로 가는 본선 파이프라인과도 단절되었다.
노보로씨이스크의 러시아 해군기지 또한 공급이 끊겼지만 흑해 함대는 과거 러시아의 주요 석유 수출 센터였던 바투미에서 석유를 공급받아 작전이 가능했다. 바투미는 바쿠와 철로 및 복선의 파이프라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바투미에는 정유산업이 발달해 연간 350만톤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파괴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히틀러는 코카서스에서 단 한방울의 석유도 짜낼 수가 없을 것이오'라고 스탈린은 바이바코프에게 말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그로즈니 근처에 여러개의 생산 유전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스탈린은 4개 시베리아 사단을 카스피해 지역으로 보냄으로서 빼앗겼던 지역을 회복할 수가 있었다.
독일군은 그로즈니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모르즈크로 퇴각해서 계속 비행 대대를 출격시켜 그로즈니의 정유공장들과 유전들을 폭격했다. 바이바코프는 이 공습중에 목숨을 잃을 뻔 했다. 그는 적의 공격하에 차를 몰아 정유공장으로 가고 있었다.
폭탄 하나가 그 차 근처에 떨어졌다. 한 소방대원은 그 폭탄이 폭발해서 죽었고 바이바코프와 그의 동료들은 공습이 끝날 때까지 도랑에 몸을 숨겼다. 소련 공군기들이 굳게 방어한 바쿠의 유전들은 독일군에 의한 공습을 면할 수가 있었다.
크라스노다르와 마이콥프에서 생산이 재개되자 히틀러의 군대는 볼가강 하류로 눈길을 돌렸는데 거기에는 바쿠와 연결된 러시아 내륙으로의 유일한 석유 수송로가 있었다. 볼가강은 독일군이 침공해오기 전까지 러시아 석유의 주요 수송로였다. 볼가강은 연간 750만톤의 석유제품을 날라주었다. 볼가강 근처의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독일군의 격렬한 공격은 `제2의 바쿠'인 볼가-우랄 지역의 석유생산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 지역에서는 1934년까지 상업적 생산이 이뤄지지 않았으나 1938년부터 생산량이 급증, 1938년에는 180만톤에 이르게 되었다. 새로 개발된 유전들은 곧 생산단계로 들어가 부근의 새로운 정유공장에서 원유가 정제되었다.
철도와 해상의 석유수송은 소련 군대에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열쇠였다.
독일군의 로스토프 침공은 막대한 수송 문제를 발생시켰다. 석유는 카스피해를 통하거나 터키-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수송되어야만 했다.
이것은 길게 돌아가는 수송 방법이었다. 카스피해를 통한 수송은 러시아가 처음으로 해상 석유 수송 작전에 전념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스탈린그라드의 폭격은 소련이 더 이상 볼가강 수송로를 사용할 수 없음을 의미했으므로 바이바코프는 사라토프와 아스트라칸 사이에 석유제품 파이프라인을 건설토록 했는데 건설은 독일군의 격심한 공습 아래서 강을 따라가며 진행되었다. 그러나 건설 작업은 신속히 이뤄졌다. 바이바코프의 말처럼 모든 이들의 `영웅적' 노력이라 할 수 있었다.
바이바코프의 말에 의하면 독일군은 러시아 전토에 산재한 모든 유전에 대해 심층적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독일의 선전장관 이었던 괴벨스는 이른바 `녹색 파일'이란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파일에는 러시아의 자세한 경제적 데이터가 들어 있었다. 그들은 바이바코프와 그의 팀이 코카서스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간파하고 있었다.
전쟁중에 소련은 석유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손상당했다. 1940년에 소련은 3,300만톤을 생산했다. 바이바코프가 석유장관(narkom)이 되었던 1944년에는 생산량이 고작 1,900만톤에 불과했다. 바이바코프는 석유장관으로서 스탈린과 전후의 석유산업의 재건을 논의했다. 스탈린은 항상 바이바코프의 말을 경청해주었고 자주 의문나는 점을 질문하고는 했다.
1946년 2월 볼쇼이 극장에서 열린 대회에는 모든 정치국원이 참석해 있었는데 스탈린은 석유생산을 6,000만톤으로 증대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바이바코프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바이바코프의 노력 결과 석유생산은 1955년에 7,000만톤에 달했고 1963년에는 무려 2억4,300만톤에 달하게 되었다.
바이바코프는 1965년에 Gosplan, 즉 국가계획위원회의 의장이 되었다. 그는 이 직위를 1985년까지 유지했다.
소련 공산주의가 붕괴되면서 러시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세계적 경향이다. 단절되었던 러시아 문화의 엄청난 foundation이 향수를 불러올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니콜라이 바이바코프, 그는 한낱 소련의 석유장관으로서가 아니라 러시아적 영웅적 행위로서 재조명 되어야 할 것이다.〈Tetroleum Economist刊 세계에너지연감 1998년도 참조〉


이승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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