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리뷰/ 니콜라이 바이바코프(3)
에너지리뷰/ 니콜라이 바이바코프(3)
  • 한국에너지신문
  • 승인 2002.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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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바코프는 코카서스에 몇 달 동안 머문 후에 유전지대와 유전시설을 관리하기 하기 위한 전투를 더욱 강화했다.
독일군은 그로즈니에서 진군을 멈췄다. 크라스노다르에서는 1,300개 유정이 폐쇄되었다.
이들 유정 중 몇몇은 심도가 2000m 이상 되어서 소련 팀들은 20m 두께의 철근 콘크리트로 봉해야 했다. 더 이상 깊이 봉합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당시 누구도 봉합을 더 깊이 하기 위해 암석을 뚫을 수 있는 드릴 비트(drill bit)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한편 러시아인들은 영국 기술자들의 자문을 구하기 위해 그들을 모스크바에 초대하게 되었다. 영국인들은 일본의 침입이 있을 때 석유 생산을 보호하기 위해 보르네오에서 유정을 폐쇄한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크라스노다르의 유전들은 독일군에 심하게 폭격 당해 소련의 석유 수송 열차가 운행을 중단하게 되었다. 폐쇄 작업은 완벽하게 성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독일군이 크라스노다르와 유전지대를 6개월 동안 점령했을 때 단 1톤의 석유도 생산할 수가 없었다. 폐쇄작업은 성공적이어서 독일군이 크라스노다르를 재점령 했을 때도 기술자들이 유정을 새로 뚫어야하는 곤경을 겪게 되었다.
바이바코프가 유정 폐쇄 명령을 내릴 때 그는 크라스노다르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팀은 독일군이 그곳을 침공하기 직전에 그곳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독일군이 크라스노다르를 점령하기 전 한 달 동안 바이바코프와 그의 부하들은 모든 유전의 하부구조를 폭파시킬 계획을 세웠다. 발전소들도 폭파시킬 계획이었다. 독일군이 침공하면 즉시 폭파시킬 수 있도록 준비를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때가 되면 누가 폭파 명령을 내리느냐 였다.
바이바코프는 스탈린을 찾아가 `누가 폭파 명령을 내릴 겁니까?' 하고 물었다. 스탈린은 그것은 바이바코프와 소련 남부 전선을 지휘하고 있는 군사령관 부디오니의 공동 결정 사항이라고 말했다. 바이바코프는 부디오니와 상의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스탈린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디오니는 애국전쟁(특히 1920년대 카자크인들에 대한)시 창의적인 지휘관이었지만 그는 결단을 못내리는 약한 사람이었다. 1세기 전의 장군들처럼 그는 군대를 움직이는데 마필에 의지하는 그런 사람이라고 바이바코프는 생각했다.
독일군이 크라스노다르로 진격해 오고 소련군이 퇴각하게 되자 바이바코프는 부디오니를 만나 크라스노다르와 마이콥프에 있는 유전 시설들을 폭파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줄 것을 요구했다. 마이콥프시는 벨라야강 오른쪽 뚝 위의 요새로서 1857년에 설립되었는데 이 시의 남서쪽에는 다수의 유전이 있었다. 바이바코프는 모든 정황으로 보아 소련군이 대규모 독일군과 맞서지 못하고 퇴각중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부디오니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바이바코프에 한 말은 “내 기병대를 보시오, 독일군에 얼마나 잘 버티고 있나”라는 것이었다.
부디오니는 전혀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마필로 어떻게 독일군의 탱크를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모든 가동에너지 시설의 폭파를 결정한 것이 바이바코프였다. 바이바코프는 자기가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 만사는 너무 늦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이바코프는 크라스노다르에 마직막까지 남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바이바코프와 그의 석유팀은 부디오니가 지휘하는 퇴각하는 소련군이 주둔한 투압세로 가는 남쪽길을 이용하지 않고 산악쪽으로 향했다.
석유팀의 일부는 독일군이 손상된 시설을 복구하는 일을 막기 위하여 빨치산 그룹을 형성했다. 10명의 기술자들과 바이바코프는 독일군을 피해가며 8일 동안 도보를 걸었다. 우파 강가에 도달했을 때 한 소련인이 크라스노다르의 하부구조가 파괴되었음을 알리는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바쿠의 인민위원회는 바이바코프와 그의 부하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었다. 투아프세에 있는 소련군은 그들이 크라스노다르에서 퇴각하는 중에 살해되었다고 바쿠시에 전했다.
바이바코프와 그의 팀은 크라스노다르와 마이콥프의 석유시설 파괴에 있어서 주도면밀해야만 했다. 독일군은 숙련된 석유기술자들의 노동 대대를 동반하고 있었다. 석유시설을 재가동시키기 위해서였다. 이 노동대대는 시추기와 부분 부분으로 나누어진 정제시설을 가지고 있어 곧 정유공장을 건설할 수가 있었다.  독일군은 마이콥프의 신유정들이 신속히 시추할 수 있어 가솔린, 경유, 잔사유 등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원유를 현지에서 즉시 조달, 정제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이승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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