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리뷰/ 파자마 바람의 정치가 모사데그
에너지리뷰/ 파자마 바람의 정치가 모사데그
  • 한국에너지신문
  • 승인 2002.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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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헤밍웨이는 스페인 처녀 마리아와 영국 군인 로버트 조단의 사흘 간의 짤막한 사랑을 외설스러울 정도로 표현하고 있다. 거기에 이런 말이 나온다. 여자는 땅바닥이 빙빙 도는 듯한 오르가즘을 일생에 세 번 느낀다는 것이다. 보통 여자에겐 한번도 없을 수 있다 한다. 그 사랑이 그 정도로 뜨거웠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소설에는 스페인 사람들과 사귀기 위해서는 남자에게 담배를 권하고 여자에게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소설의 말미는 로버트 조단이 죽는 비극이다.
필자는 가끔 생각할 때가 있다. 로버트 조단이 죽지 않았으면 스페인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을지 모른다고.
자기들 여자 보호 본능은 민족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국가에서는 여성이 부자유스런 상황을 우리는 알고 있는데 이는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종족 보호 본능일 것이다.
나이든 이들은 20세기 초반에 페르샤에서 페미니즘 성향과 고루한 여자보호본능이 갈등을 야기한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이 갈등은 묘하게도 석유위기와 연계된 것이다.
이란 군인 리자 샤는 영국, 러시아에 침략 당한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전 왕을 퇴위시키고 20세기에 이란에서 새로운 왕조를 시작했다. 그는 이란 여성을 베일로 얼굴을 가리는 것에서 해방시켰으며 여성에게 유리하게 이혼법을 개정했다. 그는 즉, 근대화를 꾀했다. 그러나 세계 제2차 대전 중 주축국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영국, 프랑스의 압력을 받아 퇴위하고 장남인 무하마드 리자 샤 팔레비에게 양위하였다.
팔레비는 농지개혁과 종교개혁 등을 꾀해 부왕의 근대화 성향을 이어받았다.
민족주의자 모하마드 모사데그는 이 시대의 인물이었다.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모사데그는 지배층 엘리트의 일원으로서 성장했다. 스위스 로잔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1914년 이란으로 귀국, 파르스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리자 샤 치세 동안 그는 재무장관, 외무장관 등을 역임했고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리자 샤가 독재정치를 하자 의원직에서 물러나버렸다. 그러나 리자 샤 퇴위 후에 다시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공공연한 민족주의 주창자였던 그는 소련의 이란 석유산업 진출을 막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고 영국이 소유했던 Anglo-Iranian Oil사를 국유화시킴으로 강력한 정치력을 획득했다. 그 결과 팔레비왕은 마지못해 그를 수상에 임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민족주의자 모사데그와 근대화 주창자 팔레비왕 사이의 권력 다툼이 본격화된 것이다.
1953년 8월 팔레비왕은 모사데그를 수상직에서 해임하려 했으나 모사데그를 추종하는 폭도들의 시위에 팔레비왕은 국외로 망명했다. 그러나 며칠 안되어서 반대 세력들이 권력을 다시 장악, 팔레비왕이 복위되었고 모사데그는 반역죄로 3년 징역형을 살고, 그 후의 여생도 자택감금 상태에서 보냈다. 그러나 모사데그가 지펴놓은 민족주의는 꺼지지 않은 상태였다.
1977년 팔레비왕 암살계획이 발각되었고 그 결과 왕은 3만∼6만명으로 추산되는 사바크라는 거대한 비밀경찰 조직을 만들어 국민을 감시하게 되었다.
1978년 5월 회교도들과 대학생들 반정 데모가 일어났고 10월에는 석유 노동자들과 공무원들도 파업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른바 이란 혁명의 발발이었다. 당시 이란의 석유일일 수출량 580만b/d는 1979년 1월에 가서는 제로 상태가 되었다.
1979년 1월16일 팔레비는 이란을 떠났다. 그는 휴가차 출국한다고 말했으나 그가 돌아오리라 생각하는 이란 국민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의 출국을 축하나 하듯이 거리에서는 사람들이 춤을 추어댔다.
파리에 망명중이던 회교 지도자 아야툴라 호메이니 옹이 귀국,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호메이니는 이란이 순수 회교국이 되어야 하며 서구로부터 민주주의를 포함해서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상황은 이란 여성들에게 과거로의 복귀를 의미했다. 이들 시아(Shia)파 회교도들의 집권은 가뜩이나 나빴던 대 이라크 관계를 더욱 악화시켜 1980년 9월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치달았다. 이는 400만b/d 정도의 물량이 석유시장에서 사라짐을 뜻했다.
제2차 석유위기의 발생과정이 대강 이러했다.
 이란 혁명의 씨앗이었던, 그로해서 제2차 석유위기로 번져갔던 민족주의의 근원 모사데그는 기행으로 세계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파자마 바람으로 대중들 앞에 서는가 하면 침대에서 의회 연설문을 작성, 의회로 보내고 상습적으로 대중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정치가였다. 그의 지지자들은 이는 병 때문이라고 변호했던 반면 비방자들은 자기 홍보를 위한 교활한 술책이라고 말했다.
당시는 `근대화'가 이란내에서 유행하던 시기였다. 그렇다면 상궤를 거부하는 그의 기행은 이에 대한 끈질긴 반발이며 민족주의로의 완고한 회귀였으리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승재 칼럼리스트/ 2002-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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