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퇴임하는 김형진 녹색에너지연구원 원장
[인터뷰] 퇴임하는 김형진 녹색에너지연구원 원장
  • 오철 기자
  • 승인 2019.01.28 1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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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간 녹에연 10배 키워내고 인생 3막 준비

최하 말단서 원장 자리 올라 박사학위 취득까지
사업 개념으로 지역 맞춤형 연구과제 발굴·추진

직원 8명→90명·매출 19억원에서 200억원으로 
수익 내며 폭풍성장…애물단지 연구원을 보배로 

[한국에너지신문] 국내 연구원은 예산으로 운영하는 것이 보통이다. 연구원을 기업의 개념으로 보고 성장 가도를 달린 녹색에너지연구원은 새로운 연구원의 모델이다. 연구원을 10배나 성장시킨 김형진 원장은 어떤 사람인지 만나 보았다.

 “열심히 하는 사람이 프로다”

김형진 원장
김형진 원장

“직원도 10배, 매출도 10배로 키웠습니다.”
지난 21일 퇴임을 열흘 앞둔 김형진 녹색에너지연구원장을 목포 연구원에서 만났다. 김 원장은 지난 6년간의 성과를 한마디로 정리했다.

김 원장이 처음 부임할 당시 총 8명이었던 연구원은 90명으로 늘어났고 매출은 19억원에서 지난해 200억원을 넘겼다. 재임 6년 동안 10배가 넘는 성장 가도를 달려온 것이다. 

녹에연은 2009년 ‘서남권청정에너지기술연구원’이라는 이름으로 목포시 산하 기관으로 발족했다. 국내 기초지방자치단체 최초 에너지 연구기관으로 산자부가 낙후지역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설립한 기관이다.

출발 5년은 운영비가 지원되었지만, 그 이후 연구원은 마땅한 진로를 찾지 못했고, 목포시의 애물단지로 전락한 6년 전인 2013년 김 원장이 부임했다.

목포시가 전남테크노파크로 예속시켜 명맥이나 유지하려 하던 찰나에 김 원장이 사업계획서 두 장을 들고 도지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연구원을 전남도 산하기관으로 독립 운영하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당시 도지사는 현 이낙연 국무총리였다.

달랑 사업계획서 두 장으로 시작한 김 원장의 6년간 노력은 연구원을 살린 것은 물론, 녹에연을 전남도 에너지 정책의 본산으로 우뚝 세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녹에연처럼 낙후지역 지원 사업으로 세워진 18개 지방 특산물 중심의 연구기관 중 유일하게 성장 가도를 달리는 연구원이 되었다. 그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 많은 사람이 연구원을 찾은 것은 물론이다. 

녹에연은 지난해 감가상각비 7억 5000만원을 포함 총 3억 5000만원의 이익을 남겼다. 매출은 200억원이 조금 넘었다. 전남도의 예산지원은 6억원이었다. 국내 연구원 가운데 이러한 재무구조로 되어 있는 곳은 없다. 

애물단지를 살려낸 김 원장에게 전남도는 공모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재임용장을 주었다. 요즘 인사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 지역 특성화 연구과제 추진…수익 내는 연구원

연구원이 매출을 올리고 수익을 내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물었다.
“중앙연구기관은 많은 예산이 내려와 적당히 하면 되지만 지자체 연구원 예산은 기본 인건비도 되지 않아요. 연구원도 사업 개념으로 과제를 발굴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김 원장은 비록 지방 연구원이지만 글로벌 연구원으로 위상을 높여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세계적인 이슈를 다루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 글로벌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한 생각으로 시도한 것이 염전 태양광 발전 사업이다. 전국 염전의 80%를 소유하고 있는 전남의 특성을 활용하기 위한 연구과제다. 염전의 바닥에 태양광을 까는 아이디어로 일종의 수중 발전이다. 연구성과는 물이 온도를 낮추어 주기 때문에 일반 설비보다 발전량이 5%나 많았다. 이 과제는 올해 상반기 과제 연구가 종료되면 설치 기준을 마련하여 염전에 보급할 계획이다.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 연구하고 있는 것이 영농형 태양광 발전이다. 논밭에 태양광 설비를 설치하고 아래에는 농작물을 재배하는 연구과제다. 연구 결과 농작물(벼)의 생산이 20% 줄어드는 대신 발전 사업으로 농가가 얻는 수익은 몇 배가 된다는 결과를 도출해 냈다. 이 연구를 위해 영농형 태양광 산업이 발전한 일본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

올해 산자부가 영농형 태양광 사업을 추진하려 했으나 농식품부가 태양광 수입이 좋으면 농민이 농사를 짓지 않을 것이라고 반대해 현재 부처 간 쟁점이 되고 있다.

일본은 현재 영농형 태양광 사업지가 2천여 곳으로 농사를 계속 짓도록 하기 위해 농사를 짓지 않을 경우 가중치를 떨어뜨리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농식품부는 최근 재생에너지과를 신설해 자체 사업으로 추진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김 원장은 대표적인 2가지 과제를 더 소개했다. ㎿급 태양광 발전 시스템 실증 사업과 농공산단지 마이크로그리드 실증 과제다. 모듈의 효율이야 나와 있지만 실제 설비를 갖추었을 때 시스템의 효율을 인증해야 한다. 이것이 있어야만 우리 기업들이 해외 사업을 원활히 할 수 있게 된다.

마이크로그리드 사업은 산업단지 6개 공장에 재생에너지 설비를 설치해 상호 생산된 에너지를 주고받으면서 사용하는 시스템이다. 전력공급이 원활한 국내에서는 크게 효용 가치가 없을지 몰라도 해외 시장이 많아 수출용으로 개발한 연구과제다. 이 과제 연구로 베트남에도 진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 프로의 자세로 얻은 전문가 타이틀

기관장 6년도 이 시대에 어려운 일인데 3연임 이야기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하자 “목포에 아무런 연고가 없어요. 그런데도 6년이나 일할 기회를 얻었으면 많이 했잖아요. 붙잡힐까 봐 몇 달 전부터 그만하겠다고 선언했어요”라고 답했다.

에너지공단 출신으로 연구원을 이렇게 키울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전 프로였던 것 같아요. 프로가 따로 있나요. 열심히 하면 프로가 아니겠어요”라고 말한다.

김 원장은 지나온 세월의 이야기를 꺼냈다. 1955년생으로 당시 생활이 어렵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마는 고향 충청도 예산을 떠나 서울로 이주하면서 국민학교 시절부터 신문 배달, 급사 등 해보지 않은 일이 없다고 한다. 신문 한 장을 더 돌리려고 뛰어다녔고 어떤 일이든 즐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탓으로 김 원장의 최종학력은 중졸이 전부. 자동차 정비 업소를 다니면서 야간 직업훈련소에서 배운 태양열 기술이 인연이 되어 에너지공단에 입사한 것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고 한다. 

대학 졸업장이 없는 관계로 6급 최하 말단 직원으로 입사한 김 원장은 맡은 일마다 최선을 다해 여러 가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태양열 엔지니어로 입사했지만 홍보를 담당하며 홍보 전문가, 에너지 절약 촉진대회를 8번이나 개최하며 행사 전문가, 중국어를 공부하면서 중국 전문가, 재생에너지 보급실장을 맡으면서 신재생에너지 전문가 등 수많은 전문가 타이틀을 얻었다고 한다.

최하 말단으로 입사해 유일하게 공단의 센터 소장으로 임원까지 승진한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전문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 일하면서도 학업에 목말랐던 김 원장은 한시도 책을 멀리하지 않았다. 공단에 입사한 후 방송통신대를 거처 경기대 석사 과정까지 밟았다. 녹에연 원장으로 부임한 뒤에는 전남대에서 공학박사 학위까지 취득했다. 

김 원장은 원장으로 재직한 6년 동안 항상 마지막 퇴근자 였다고 한다. 직원들의 퇴근 인사는 없었다. 일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원장이 퇴근 인사를 금했다. 일과 학업을 평생 함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연구원 풍토다. 원장으로 재직하는 사이 격무로 2번이나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김 원장이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주변에서는 김 원장이 목포 관내 공고 학생들에게 장학지원도 해 왔다고 한다.
김 원장은 “어려운 시절이 많았지만 종교인으로서 장로에 올랐고 공직자로서 원장, 학문적으로는 박사라는 칭호까지 받았으니 인생에 후회는 없다”고 했다.

앞으로 계획이 있는지 물었다. “우선 좀 쉬어야지요. 인생이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 아니겠어요.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 해야지요.”
김형진 원장의 인생 3막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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