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천에서] 모호한 개념이 모호한 정책을 만든다
[양재천에서] 모호한 개념이 모호한 정책을 만든다
  • 조강희 기자
  • 승인 2017.03.13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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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너지신문] ‘정부3.0’이라는 구호가 지금보다 훨씬 더 활발하게 홍보되던 한 1년여 전 쯤, 모 협회의 한 임원은 내게 이런 말을 들려줬다. “사실 정부 3.0이라는 게 개념이 없어요. 뭐 ‘선수들’끼리는 다 아는 얘기긴 한데, 그냥 ‘잘 하고 있다’, 옛날에 초등학교 때 받았던 ‘참 잘했어요’ 같은 도장 찍어주는 거랑 비슷한 거지. 뭐.”

시간이 조금 더 지난 지금은 그 정도의 의미도 아닌 것 같다. 개방과 공유, 참여와 소통은 중요한 개념이라는 데에는 충분하게 동의할 수 있다. 정부와 공기업에는 더할나위없이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그것을 구호화하거나, 그 구호에 편승해 아무것도 아닌 일을 실적으로 만들어 남기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더구나 개방과 공유, 참여 등을 기본으로 하는 ‘정부2.0’과 슬로건으로나 내용으로나 큰 차이가 없다. 더 힘든 일은 단순한 행사나 계획 등을 포장하기 위한 의도로 정부3.0을 사용했다는 데에 있다. 정부 산하에 있는 공기업이나 각종 연구기관 및 단체 등은 사용이 아니라 거의 남용 수준으로 ‘정부3.0’을 내세우고 있다.

물론 그 ‘내세움’은 자의 20%, 타의 80% 정도이리라. 그 덕분인지 잠시나마 신선했던 그 구호는 이제 전혀 신선하지 않다. 밖에서 지켜보는 사람이야 그렇다치자. 하지만 시키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과연 보람이 있을까.

그래서 ‘정부3.0’은 이제 슬슬 퇴장을 준비하는 분위기다. 그랬더니 이제는 ‘인더스트리 4.0’ 또는 ‘4차산업혁명’이 스물스물 그 모호함의 자리를 꿰차러 들어오는 듯하다. 4차 산업혁명과 인더스트리 4.0은 이제 흔한 구호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확실하게 분명하게 알고 쓰는 이는 20%도 되지 않는 것 같다. 산업에 인공지능과 원격통신과 같은 정보통신혁명의 다양한 결과물을 접목하는 것이 ‘4차 산업혁명’의 올바르고 또 좁은 개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새롭기만 하면 일단 무조건 ‘4차 산업혁명’의 딱지를 붙이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정부의 정책을 보면 개념이 모호한 말이 참 많이 사용되고 있다. 에너지산업은 그렇다치고, 에너지 ‘신’산업은 무엇인지, 그러면 그 대척점에 있어야 할 에너지 ‘구’산업은 무엇인지 분명한 개념도 없고 합의도 미처 다 되지 않았다.

에너지와 관련된 새로운 사업이면 다 포함되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있는 것 같은데, 누구에게 어떻게 새로운 것이 기준이 되어야 하느냐는 물음에는 선뜻 대답하러 나서는 사람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신재생에너지와 스마트그리드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하는데, 포괄되는 두 개념 역시 합의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맹점이다. 그러고 보면 정말 모호하긴 한 것 같다.

이렇게 모호한 개념들로 정책을 정하는 것, 그리고 그 정책이 실제로 실행되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다. 물론 학계나 연구계 단위에서는 모호한 개념도 충분히 쓰일 수 있다. 연구를 위해서는 다양한 사례와 개념이 필요하기에 어느 정도는 허용돼야 한다.

하지만, 정책을 집행하는 정부에서는 그 개념에 구체성을 부여해야 한다. 그리고 그 부여된 구체성을 바탕으로 정책을 만들고 집행할 수 있다. 구체적이지 않은 개념은 구체적이지 않은 정책을 만든다. 그래서 정부의 어떤 정책들은 효율도 효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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