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너지] 요즈음 모 방송국에서 주말 연속극으로 방영하는 징비록은 별로 인기가 없는 것 같다.
왜 인기가 없는지는 본란에서 다룰 일은 아니다. 인기가 없다는 것은 징비록에 대한 이해 부족이 아닌가 싶다.
징비록은 선조 시절 영의정을 지내면서 임진왜란을 맞아 조선을 방어한 영의정 유성룡 선생이 낙향하여 두 번 다시 이 같은 과오를 겪지 말자는 경계의 의미에서 임란의 실상을 상세히 기록하여 후세가 귀감으로 삼도록 한 것이다.
임란은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하면서 발발되었다. 20일 뒤인 5월 3일 수도인 한양을 빼앗기고 선조는 평양으로 피신했다. 당시 교통수단으로 보면 보병이 근간이었던 왜군이 그냥 걸어서 한양까지 도달 할 수 있는 시간 밖에 되지 않는다. 방어라고 할만한 전투는 신립 장군의 탄금대 전투가 고작이었다. 왜군은 평양성까지 점령하면서 선조는 의주로 피하여 당시 명에 망명까지 요청한 임진란은 한민족의 역사상 외세에 의한 가장 큰 전란이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임란은 한갓 역사 속의 일들로만 치부할 뿐 오늘날 그 교훈을 까맣게 잊고 있다.
왜군을 막지 못한 것은 기본적으로 조선이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평화시대가 너무 길었던 탓에 국방을 게을리했던 것이 원인이다.
지금 우리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6.25 이후 우리 역사상 드물게 60년 이상 평화의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방위사업의 비리가 끝이 없고 군 장성의 진급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이다. 60만 대군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이 전쟁이 나면 과연 국가를 지킬 수 있을까?
임란 시 적과 싸워야 할 관군을 지휘하는 장수가 도망을 가버린 사례가 한 둘이 아니다.
심지어 선조가 피난을 하면서 한양을 방어하라고 한 장수조차 도망을 가버렸다. 당시 사정이야 어찌되었던 어명을 어기고 도망을 가는 장수가 비일비재 했으니 어명을 받지 않은 지방의 사또들이야 오죽했겠는가!
방위 사업을 하면서 뇌물로 얼룩지고 장성진급을 정상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전쟁이 일어나면 목숨을 걸고 싸우겠는가?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을 물리친 것은 이순신과 유성룡이 양대 축이 되었지만 근간은 이름 없는 백성들로 구성된 의병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각지에서 지조강건한 선비들이 사제를 털어 의병을 모집하여 곳곳에서 일본군을 괴롭히고 격파했다.
권율·곽재우·고경명 등 익히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의병을 모집하여 나라를 구하고자 목숨을 바쳤다. 충효를 기본으로 하는 유학이 사회 철학이었던 그 시절 지도층 인사와 백성들은 우국충정으로 목숨을 바쳤다. 의병의 활동으로 왜군은 후방의 안전과 보급을 위해 병력을 분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전략에 차질을 빚었다. 의병은 6.25 때 책 대신 총을 잡은 학도병이었다. 선조 시대는 율곡 이이 퇴계 이황·이덕형· 이항복·정철·김성일 등 조선 역사에 가장 인재가 많은 시대였다. 그럼에도 십만양병설을 주창하기는 했지만 임진왜란이라는 한민족사에 가장 치욕적인 전쟁을 막아내지 못했다.
이유는 국론의 분열이다. 동인과 서인이 대결하다가 동인이 남인 북인으로 갈라졌고 서인은 노론 소론으로 갈라져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만 몰두했다. 일본의 통신사로 파견됐던 황윤길과 김성일의 보고 내용이 달랐던 것은 당파의 이해관계가 원인이라는 주장이 많다. 일본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상황판단으로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유성룡이 군제 개혁 등 대비책을 내놓았으나 당파적 이해관계로 하나도 시행되지 못했다.
조선 역사가 당파로 망했다고 역사서에서 우리는 배웠다.
지금은 어떤가? 정당제도가 민주정치의 근간이라고는 하지만 정당은 국가발전을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오직 권력을 탐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양대 정당의 확립이 정당정치의 성숙도를 보여 준다고는 하나 정당은 또 다시 그 속에서 수십 갈래로 갈라져 파벌을 형성하고 한 집단 내에서도 끊임없는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다. 선조 시절 중앙 관료를 중심으로 지역 간 파벌이 형성되었듯이 인맥과 학맥 등 갖가지 이유로 파벌이 형성되어 있다. 정치판만 그런 게 아니다. 한국 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식인 집단인 교수 사회도 끼리끼리 집단을 만들어 분파를 이루고 있다. 대표적인 행태가 학회다. 똑같은 학회가 학교마다 교수마다 만들고 있다. 조그만 조직을 키워 크게 만들기 보다는 큰 것을 쪼개어 작은 것으로 만들고 있다.
세계무대에서 하나로 힘을 모아 글로벌 리더 국가로 나아가야 하는데 이리저리 갈라져서 들러리서기도 바쁜 형국이다.
임란 때 일본은 서구에서 조총을 받아들여 단숨에 군사적 우위를 확보했다. 말로는 글로벌 시대라고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물 안에서 서로 힘을 겨루고 있다. 우리 경제가 20년이나 제자리걸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백여년 전 민족사의 가장 큰 치욕을 겪고 이를 후세에 남겨 교훈으로 삼도록 한 것이 징비록이다. 우리의 가슴에 손을 얹어보자. 임란 시와 지금 달라진 게 무엇이 있는지?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공격 했을 때도 나라를 구한 것은 임진왜란 때와 마찬가지로 백성들이었다.
국민들이 역사의 교훈을 깨닫지 못하면 또 다시 목숨 걸고 싸워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징비록을 보아야 하는 이유다.
유성룡은 임란에서 전군을 지휘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는 파직을 당하고 낙향한다. 그리고 이에 모자라 삭탈관직까지 당한다. 선조라는 임금이 통치를 잘못했기도 하지만 근본은 한민족의 뿌리깊은 파당에 기인한다 할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유성룡이 태어난 하회마을은 고 저택이 즐비하지만 유성룡의 생가는 없다. 낙향하여 이웃마을에 집을 빌려 징비록을 집필하고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자손이 하회마을에 집을 지으니 우리는 충효당이라 부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