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와 늑대의 싸움
여우와 늑대의 싸움
  • 신병철 (사)에코맘코리아 정책위원
  • 승인 2012.09.21 0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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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개도국간 역량 차이 커

 

▲ 신병철 (사)에코맘코리아 정책위원

필자는 젊은 시절 런던의 한 평범한 가정에서 약 한 달 남짓 홈스테이를 한 적이 있다. 사람을 좋아했던 필자는 그 집 식구들과 무척이나 친하게 지냈었다. 그 집에는 어머니와 당시 필자와 동갑이었던 아들, 그리고 여동생이 함께 살았다. 당시 5살 된 프린스라는 셰퍼드도 한 마리 있었다(얼마 전 확인해 보니 천수를 다한 후 죽었다고 한다).

 

어느 날 그 집 어머니가 친정에 좀 안 좋은 일이 있어 이틀 간 집을 비우셨다. 철없는 아이들은 그 동안 집에서 파티를 벌였다. 필자는 그 날 처음 서양인들의 파티문화를 체험했다. 오빠의 친구들과 여동생의 친구들이 상당 수 모였고 대부분 밤을 새워가며 상당량의 술을 마셨다.

그들 중 눈에 띄게 잘 생긴 남성이 한 명 있었다. 190cm 정도 되는 신장에 건강한 체격, 준수한 용모를 가진 전형적인 영국 신사의 풍모를 풍기는 이였다. 게다가 직업도 변호사, 누가 봐도 전형적인 엄친아였다. 필자와 홈스테이 집 아들, 그리고 변호사는 모두 동갑이었고 그래서인지 새벽 늦게까지 셋의 술자리가 이어졌다.

우리사회만 술을 권하는 것이 아니다. 겪어 보니 이들의 술 권하는 문화 또한 집요했다. 그래서 필자는 그 날 독한 위스키를 상당량 마셔야만 했다. 술을 마시니 변호사의 숨겨진 모습이 도출되었다. 그는 자랑스럽게 그동안 자신이 섭렵해온 여성들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추한 이야기들도 섞여 있었다.

놀란 필자도 솔직하게 응대했다. “당신처럼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이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고!"

그 때 홈스테이 집 아들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Don't judge a book by its cover!"(책의 겉모양만 보고 내용을 판단하지 마세요!)

CDM사업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자본과 기술투자는 대부분 선진국이 담당하게 되고 장소의 제공은 개도국 기업들이 하게 된다. 유럽의 기업들은 대부분 전담부서와 인력이 갖추어져 있는 반면 개도국 기업들은 한 담당자가 다른 일을 하면서 CDM은 곁다리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업무에 대한 이해도와 전문성뿐만 아니라 하루 중 CDM 업무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도 상대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게 된다. 자연스럽게 모든 업무는 유럽의 담당자가 주도하게 되고 개도국의 기업 담당자들은 실제적으로 그들에게 많은 의존을 하게 된다.

경험적인 측면에서도 양자 간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을 하면 유럽의 담당자들은 개도국의 담당자들을 가르쳐가면서 일을 진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유럽의 담당자들이 상대적으로 우위에 놓일 수밖에 없다. 특히, 심리적으로도 한쪽이 의존하는 관계가 형성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배출권거래계약(ERPA) 체결에 있어서도 두드러진다. 필자도 배출권거래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유럽기업들이 내민 계약서 양식을 몇 번 접해보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그네들에게 유리한 내용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법률 문외한인 필자가 보기에도 이러하다면 좀 더 전문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았을 때 더욱 많은 숨은 함정들이 발견될지도 모를 일이다.

배출권거래계약이 체결된 후 특별한 일이 발생하지 않으면 별일 없이 넘어갈 수도 있지만 만일 예상치 못한 사건이라도 발생하게 되면 그 때부터 계약서를 기반으로 한 그네들의 얄궂은 행각이 시작될 수도 있다.

2~3년 전만해도 CER의 가격은 톤 당 10유로 이상에 거래가 됐다. 당시 적지 않은 유럽기업들이 개도국의 기업들과 고정가격으로 ERPA를 체결했다. 물론 변동가격으로 체결해 충분히 리스크를 헤지해 놓은 경우들도 있다.

지금은 톤 당 가격이 3유로 선. 고정가격으로 계약을 체결해 놓은 유럽기업들은 난리가 났고 곧이어 우위를 점하고 있는 ERPA에 근거해서 열심히 계약파기를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수개월 전 필자가 접해 본 수개의 유럽기업 담당자들은 필자에게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솔직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물론 독일의 몇 개 기업들은 신용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계약의 내용을 이행해 나갈 것이라는 듬직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이러한 상황이라면 개도국의 기업들은 강력한 힘을 가진 두 얼굴의 사나이 앞에서 자기방어를 하기 힘든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중국의 동쪽에 위치한 A기업의 사례다. 협상을 거쳐 유럽의 B기업과 배출권거래계약을 체결하기로 하고 10유로 이상의 고정가격으로 해서 거래계약서의 세부협상까지 마쳤다. 이제 계약서에 양사의 대표자가 서명만 하면 거래계약이 체결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실무진의 노력과 성실한 변호사측의 지원으로 추진된 것이었다.

하지만 A기업의 간부는 승진을 위해 사장에게 좀 더 어필을 하고 싶었다. 사장이 직접 유럽의 B기업으로 가서 그 곳 대표와 서명식을 개최해 눈에 띄는 실적을 만들어 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실무진에게 그렇게 일을 진행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A기업의 사장은 무척이나 바쁜 사람이었다. 스케쥴을 잡는데 2주 정도의 시간이 지나가버렸고 그 동안 탄소배출권가격은 하락하고 말았다.

B기업의 담당자는 어떻게 해서든지 당초 협상된 가격대에서 계약을 진행하려 했지만 본사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 가격은 7유로까지 떨어졌다.

탄소시장의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이 가격대에서라도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좋다는 실무진의 의견이 개진되었지만 A기업의 간부는 이를 단번에 묵살했다. 자신의 인생경험으로 보았을 때 떨어진 가격은 분명히 올라간다는 황당한 자신감만 주장했다. 주식시장을 보니 그렇더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자신은 도무지 사장 앞에 가서 7유로에 계약하자는 말을 꺼낼 수가 없다는 말도 했다. 그러면서 줄곧 가격이 떨어지기 전의 10유로 이상 대에서 계약을 체결할 것만을 요구했다.

B사의 담당자도 도의적 책임을 지고 본사를 설득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양사간의 계약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후 늑대 같은 A사의 간부는 모든 책임을 실무자와 B사에게 전가해 버렸다.

공개회의 석상에서도 자신은 역할을 다했는데 실무자가 잘못해서 일이 이렇게 된 것이라며 크게 소리쳤다. 아직도 그 간부는 자신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여러 사람 앞에서 실무자를 비방하고 다닌다고 하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찌 이러한 일이 A기업에서만 발생하는 일이란 말인가? 탄소시장에 대해서 일자무식인 간부들이 산재해 있는 수많은 개도국의 기업들에서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답답한 유형의 에피소드 중 하나일 뿐일 것이다.

이래저래 개도국 기업들의 담당자들은 일하기가 수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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