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에 몰린 EU의 최후 한 방
코너에 몰린 EU의 최후 한 방
  • 신병철 탄소배출권 트레이더(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
  • 승인 2012.04.09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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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출권 공급량 늘어 강제적 시장 활성화

▲ 신병철 탄소배출권 트레이더(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
20대 중반 꽃다운 시절 필자는 한국디자인진흥원이라는 곳에서 일했다. 당시는 정부에서 글로벌화의 중요성을 부르짖던 때라 필자가 다니던 회사에서도 직원들을 영국에 파견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마침 운 좋게도 유럽 배낭여행의 기회가 찾아온 덕분에 필자는 큰 배낭 하나 짊어지고 영국에서부터 시작해 프랑스, 스위스, 체코 등 유럽 16개국을 여행할 수 있었다. 때로는 기차나 배를 타고 때로는 튼튼한 두 발로 유럽의 면면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러던 중 필자는 현지의 문화와 높은 삶의 질에 매료되어 버리고 말았다. 짙은 운무에 휩싸인 새벽녘 스코틀랜드의 고성, 전통과 현대가 절묘하게 조화된 런던, 반나체로 일광욕을 즐기는 독일인들과 하얀 구름 아래 펼쳐진 알프스의 마을 등을 바라보며 이왕 살거면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복지가 뛰어났다. 북유럽은 복지가 잘되어 있어 일을 하는 사람과 무위도식 하는 이의 수입이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그러면 왜 힘들게 일을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의식수준이 높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실히 땀 흘려 일 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리스 등 남유럽의 사정은 좀 달라 게으름뱅이들이 많다고 한다. 최근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GDP가 갑자기 줄어들며 재정이 파탄 날 지경에 이르자 독일 메르켈 총리가 이는 나태함이 빚어낸 당연한 결과라며 맹비난을 퍼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안타깝게도 근래 단일통화 체제로 엮여 있는 회원국들 모두가 재정위기 여파에 휩쓸리며 EU 전체의 산업 활동이 흔들리고 있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도 조만간 유로존의 국내총생산(GDP)이 0.5% 축소되며 전반적 경기불황이 찾아올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프랑스와 독일까지 언급되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얼마 전 필자가 다시 유럽을 찾았을 때 필자는 장거리 기차 안에서 노트북을 도난당했다. 살기가 어려워지자 좀도둑들이 대폭 늘어난 것. 과거와 너무나 달라진 분위기에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탄소시장에서도 CER의 최대수요처인 1만 1000여개 EU-ETS 기업들의 산업생산성이 현저히 줄어들면서 2008~2013년 기간 중 약 16억 톤에 이르는 잉여 EUA가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섞인 목소리가 도처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반면 배출권 공급량은 대폭 늘었다. 2005년 5월 최초의 CDM사업이 등록된 이후 2011년 말까지 총 발급된 CER의 양은 81만 5695톤인데 놀랍게도 2011년 한해 발급량만 3억 2000톤을 기록했고 올해에도 비슷한 물량이 발급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2011년 EU-ETS가 소화한 CER 물량이 겨우 1억 3700만 톤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시중에 나돌고 있는 잉여 CER의 양이 얼마나 많은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CER 과잉공급 현상이 빚어진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개도국에서 진행되는 CDM의 경우 올해 안에 등록이 되어야만 EU-ETS에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사업개발자들이 서둘러 CDM을 등록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배출권 발급이 촉진된 점을  들 수 있다.
둘째는 그간 권위적이고 비효율적이며 환경건전성도 부족하다는 비난에 시달렸던 CDM EB가 탄소시장 붕괴위험성까지 거론되는 사상초유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자의반 타의반 CDM에 대한 개혁에 나서면서 CER의 발급속도가 빨라진 점을 들 수 있다. 심지어 소규모프로젝트의 경우에는 일부 데이터가 부족해도 배출권이 발급될 수 있게 규정을 바꾸는 등 생존을 위한 CDM EB의 자구노력은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이에 더하여 2013년 5월부터 HFC나 N2O 등의 산업가스와 대수력 CDM을 통해 발급된 CER에 대한 EU-ETS 유통이 제한됨에 따라 이들 물건을 조기 소진하기 위한 대량 물량이 시장에 쏟아져 나온 점도 공급과잉 현상의 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또한 전반적인 경기침체로 인해 잉여 EUA를 다량 보유하게 된 EU 기업들이 현금확보를 위해 대량의 EUA 물량을 시장에 유통시킨 것도 공급과잉 현상을 심화시키고 있다. 상당수 분석가들이 2011년 배출량이 전년 대비 2% 하락할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약 3000만톤의 잉여 EUA가 추가 발생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는 중이다.

이에 더해 유럽투자은행도 작년 12월부터 총 3억톤의 EUA를 단계적으로 시장에 쏟아내고 있다. 이미 1억 톤 이상이 유통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 배출권은 EU-ETS 신규진입 기업들을 위해서 예비해 놓은 물량(NER : New Entrance Reserve)으로 EU에서는 판매수익금을 신재생에너지나 CCS 개발사업에 투자하려 하고 있다.
선진국간의 JI(Joint Implementation) 프로젝트를 통해 발급되는 배출권인 ERU의 양도 2011년 사상 최대치인 9000만톤을 기록, 배출권 과잉공급 현상을 심화시키고 있다.

여기에 더해 국제기후변화협상의 난조는 배출권 수요를 대폭 축소시키고 있다. 비록 2012년 12월 더반 기후변화총회를 통해 꺼져가는 교토의정서의 불씨를 가까스로 살려는 놓았지만 향후 이 협상의 추이를 낙관적으로 전망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요즘 경기가 안 좋아 대부분 국가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일단 돈이 들어가게 되면 부담이 되고 또 각국들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있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 인도, 미국 등 세계 온실가스 배출 상위 5개 국가들이 교토의정서에서 전부 빠져나간 상태에서 캐나다, 러시아, 일본의 탈퇴도 확실해져 이제는 고작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의 13% 가량만을 차지하고 있는 EU 홀로 독주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간 든든한 지원자 역할을 하던 호주마저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다. 탄소배출권 가격은 사상 초유의 최저가를 기록 중이고, 이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은 돌아선지 오래다. 기 투자 기업들은 지금 막심한 손해를 보고 있는 중이다.
어쨌든 EU는 자신들의 배출권거래제를 2020년까지는 지속 운영해 나갈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지만 점점 악화되는 경기상황으로 인해 내부적으로도 더 큰 반발에 부딪힐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되면 글로벌 탄소시장의 앞날은 더욱 불확실해져 갈 수밖에 없게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지금까지 쏟아 부은 정성과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이대로는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게 EU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그래서 EU는 어떻게 해서든지 사활을 걸고 배출권시장의 활성화에 나설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이러한 다급함은 바로 강제적인 시장개입(Set Aside Plan), 곧 시장에 유입되는 EUA의 양을 인위적으로 줄이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또한 나중에는 CER에 대한 추가 사용제한까지 가할 가능성도 발생할 수 있다.
사각의 링에서 코너에 몰린 EU가 최후의 힘을 짜내 야심찬 한 방을 날려보겠다는 것이다. 잘만 맞으면 탄소배출권의 가격은 올해 내에 적게는 1~2유로에서 많게는 현 수준의 두 배 까지도 상승할 수도 있게 된다. 다음 호에서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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