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광 代父,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송진수 박사 정년기념 인터뷰
“연구원은 무엇보다 정직해야 해”
태양광 代父,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송진수 박사 정년기념 인터뷰
“연구원은 무엇보다 정직해야 해”
  • 남수정 기자
  • 승인 2011.01.17 1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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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박사 인생, 태양광의 발자취 그대로
이제는 우리 기술 가져야 살 수 있어

 

▲ 송진수 박사
구랍 22일 대전 유성호텔에서 한 정년기념식이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연말이면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이날 행사의 의미는 남달랐다.

주인공은 후학이 없는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의 송진수 박사. 학계의 성균관대 이준신 교수, 고려대 김동환 교수, 에기연의 태양광연구단 후배 등 후학이 아닌 후배들이 주축이 되어 마련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날 정년기념식에는 서울대 한민구 교수, 대한제당 윤세왕 연구소장, 전자통신연구원 오수환 박사, 고려대 김석기 교수, 제주대 이광만 학장과 에기연 태양광연구단 연구원 등 150여명이 참석했다.

사회를 맡은 김동환 교수는 “인기드라마였던 ‘자이언트’를 보면서 송진수 박사님을 떠올렸다. 드라마 내용과는 무관하게 ‘자이언트’라는 제목에서 한국 태양광산업의 오늘을 있게 한 분이기 때문에 ‘이 시대의 자이언트’라 말하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는 무신, 막걸리나 한잔하게 와”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돌아온 답변이었다. 그렇게 지난달 초 대전의 한 일식집에서 막걸리 한 통을 놓고 송진수 박사와 마주했다.

“79년 연구원에 입사해 한 직장에서 정년을 마쳤으니 행복한 거 아니야”

인터뷰에 대비하고 나온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인터뷰는 무신”하고 술부터 시작하면 곤욕을 치를 텐데 말이다. 연구원 입사 초기 태양광을 홍보하기 위해 인터뷰를 몇 번 하고는 난생 처음이란다.

- 마도로스 파이프, 태양광의 대부(代父)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마도로스 파이프는 맞아. 요즘 담배도 피우기 어려운 시절인데 더구나 파이프 담배 피우는 사람은 거의 없지 뭐. 하지만 나 담배 끊은 거 알잖아. 주석에서나 한 대 피우고. 그런데 내가 태양광의 대부인가? 대부라는 말도 틀린 것은 아닌 것 같구만.”

- 대부 이야기부터 들어봅시다.
“75년 ‘에리텍션’이라는 태양전지에 관한 석사 학위 논문을 처음 써서 졸업한 후 76년 3월에 민간기업(당시 대한전선)에서 3년 정도 일하다가 79년 1월에 에기연(당시 동력자원연구소)에 입사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태양광을 연구하기 시작했지. 이듬해인 1980년에 미국 아르곤국립연구소(Argonne National Lab.)에 교환연구원으로 가서 1년 동안 비결정질(a-Si) 태양전지를, 시카고(Chicago)대학에서 집광형 태양광에 관한 연구를 했는데 아마 우리나라의 태양전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라고 할 수 있을거야. 같은해 미네소타대학교(Univ. of Minnesota)에서 박사후 과정(Post Doc.)으로 박막 태양전지 시뮬레이션 연구도 했고”

-우리나라 최초로 섬에 태양광발전시스템을 설치한 것으로 알고 있다.
“80년대 중반부터 외딴섬이나 무인등대, 국립공원 등에 국산 태양광발전시스템을 보급하기 시작했지. 그 중 마라도 유인등대, 호도 등이 생각이 나. 연구실적이 쌓이고 87년에 동자부 대체에너지전문위원회가 발족하면서 범 국가사업으로 연료전지와 태양전지를 선정하고 태양전지 상용화 사업 추진 주역을 맡았는데 이 정책이 태양광 산업화 첫 번째 정책이었지. 웨이퍼는 실트론이, 인버터는 LS산전, 유공(현 SK에너지), 시스템은 한전이 참여했었지. 그 결과 처음으로 국산화된 100kW급 태양광발전소를 호도(충남)에 설치할 수 있었지.”

- 이 대목에서 송 박사는 동자부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 정책을 추진했더라면 지금쯤 세계적인 태양광강국이 되어있을 것이라면서 “너무 아쉽다” 고 했다. 아쉬운 일들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002년 몽골에 태양광발전을, 2003년에 티베트, 중국에 태양광ㆍ풍력 하이브리드 발전시스템을 우리 기술, 우리 제품으로 첫 설치해줬는데 불과 10년도 안된 지금 우리가 경쟁에 밀린다니 말이 되겠어” (당시 우리나라 태양전지 제조업체인 KPE사 제품을 중국 썬텍파워(Suntech Power)에 공급했고, 썬텍파워가 모듈을 제작, 설치했다.)

인터뷰를 시작한 지 30분도 안되었는데 막걸리 한 동이가 동났다.
“대부면 뭘 해. 해 놓은 게 있어야지”
“일본은 30년 투자해서 세계를 휩쓸고, 중국은 불과 10년도 안 되는데 세계를 휩쓸잖아”
이 때부터 취중 인터뷰가 이어졌다.

송 박사의 태양광 개척은 계속되었다. 2001년 6월 제주에서 열린 태양광발전 국제학술회의(PVSEC-12)의 의장 겸 조직위원장을 맡아 행사를 총괄했으며(이 행사는 2009년 11월에 다시 한국에서 열렸고, 송 박사는 명예의장을 맡았다), 2008년 10월 부산에서 열린 재생에너지 국제학술대회 및 전시회(Int'l Renewable Energy Conference & Exhibition:RE-2008) 의장을 맡기도 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세계에너지총회(WEC), IEC(국제규격협회) 등 국제 에너지기구와의 협력사업, 양국간·다자간 협력사업 등 수많은 국제 협력사업을 이끌었다. 그 가운데 열정을 바쳤던 ‘동북아 신재생에너지 포럼’은 2003년부터 한ㆍ중ㆍ일ㆍ몽골 등 동북아 국가들이 모두 참여했던 다자간 협력채널. 하지만 지원이 없어 오래가지 못하고 이후 동북아 국가들의 협력채널은 아직까지 아무런 것도 없는 상태다.

- 국제 협력에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라면.
“잘 사는 국가, 기술선진국은 기술을 안 줘. ‘절대’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해. 우리나라 연구소는 MOU만 남발해. 정책도 기껏해야 2~3년 하다 말고. 무엇이든 지속적으로 해온 게 없었어. 2001년에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태양광발전 건물적용 디자인전’을 시작했는데 별의별 아이디어가 다 나왔어. 태양광 자동차(Solar Car) 사업도 마찬가지였지만 한 두 번 하고 끝났어. 미래는 전기차 시대야. 민주국가에서는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국가를 이끌어 가는 것이잖아. 그런데 우리는 공무원이 그 열쇠를 쥐고 있어. 정책이 실기하고 있는 것이야.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해왔던 여기까지 왔어. 하지만 지금까지 했던 사고방식으로는 미래에 절대 생존하거나 앞으로 나갈 수 없어. 산업화 기회를 놓치는 것이야”

- 대안은.
“연구라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게 없어. 전문가 집단으로 상설기구를 만들어 프로그램을 짜야해. 그리고 그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면 돼. 재생에너지도 국가 프로그램이 없으면 절대 될 수 없어. 만날 출연연구소는 뭐하느냐고 하는데 모든 것이 제한되어 있는 마당에 할 수 있는 게 뭐 있어야지. 우리의 경우 원자력에 대해서 국가에서 묻지마 투자를 해서 오늘에 온 것이 아니겠어. 재생에너지도 그러한 투자를 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어. 목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정이야. 일본은 이 분야에서 잘하고 있지.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기술개발만은 흔들리지 않도록 상설기구를 만들어서 정책을 추진해야 돼.”’

- 수많은 논문을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국내 200편, 국외 200편 정도 발표했는데, 뭐 특별한 것은 없고 에피소드 하나 소개할까. 90년에 캐나다에서 기조연설을 해달라고 해서 갔는데 연설문을 작성 연습을 하고 이튿날 발표를 해야 하는데 컴퓨터에 저장물이 전부 날라 가버렸어. 연습한 것을 기억 삼아 기조연설을 하고 났는데 인도식 영어로 질문을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한마디도 대답을 못했지. 기조연설이 끝난 다음 또 방송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해서 인터뷰를 하고 호텔에 들어와서 방송을 틀어보니 영어를 했는지 한국말을 했는지 영어가 짧아. 그렇게 겪어야 했던 일들이 지금은 추억이 되었네. 그때가 30대 후반쯤이었지.”

- 살면서 겪었던 일 중에는.
“2005년 태양광산업 밸류체인 작업을 한참 추진하다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중국, 일본의 지인들이 내가 죽은 줄 알고 조문을 왔어. 나 지금 두 번 살고 있는 거야. 그 때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지.”

-태양광산업, 어떻게 전망하고 있나.
“70년대 중반 미국에서 석유위기로 대체에너지라는 것이 나왔는데 2000년대 초에는 박막이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는 보고서가 나왔었다. 다시 말해 2000년대에는 투자의 과실을 거둬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기대했던 기술의 혁신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 광산업의 해답은 없다. 규격화, 표준화 2가지 접근방법이 현재로서는 가능한 일이나 신기술은 공정이 까다롭고 장치비가 너무 많이 들어 대량생산이 어렵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

"구리 정제시 나오는 카드뮴텔룰라이드는 재료 확보 공정과 환경문제로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안되고 중국도 현재 사인(정책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박막이 태양광산업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것이라 생각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고 실리콘의 재료 확보성이 용이해 현재로서는 광산업은 혼돈의 시대, 명쾌한 해답은 없다. 우리는 이 시대를 백화점식으로 하는 것보다는 선택해서 집중하고 길을 선택해서 헤쳐나가야 할 것 같다”

- 연구인생 35년을 보냈는데.
“상대방의 지식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존중해야 한다. 대만의 경우 2000년 초에 나를 포함 전문가들을 초청. 의견을 듣고 반도체에서 태양전지로 정책방향을 틀었다. 올바른 정책판단을 위해 남의 의견을 정직하게 청취하는 좋은 사례였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열정도 중요하지만 정직해야 한다. 정년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수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지만 사리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재생에너지를 하면서 ‘에너지 독립’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물론 세계적으로 유류파동 이후 미국에서 처음 나왔지만 미국의 것과 개념은 좀 다르다. 우리는 에너지를 97% 수입하는 측면에서 에너지가 경제의 근간이지만 대단히 소홀했었다. ‘에너지 독립’이란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에너지를 자족하지 않고서는 미래에 살아갈 수 없다. 대통령 소속 자문위원회인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연구용역 당시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보급목표를 13%로 했는데 11.5%로 국가 목표가 조정되었다. 현재로서는 재생에너지 밖에 길이 없다. 충분히 목표 달성이 가능하다. 재생에너지 기술 분야는 모두가 융복합이듯이 기초교육을 제대로 받은 인재를 많이 배출해서 활용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선진국을 따라가기도 바빴고 여과 없이 받아들였지만 이제는 우리의 것을 만들지 못하면 선진국 진입은 불가능 하다. 앞서 언급했지만 기술은 선진국이 절대 주지 않는다. 우리가 가진 것을 우리보다 못한 국가에 전해주고 우리의 경제 영토를 넓혀 나가야 한다”

오후 여섯 시에 시작한 자리가 아홉 시가 다 될 무렵 에기연 신재생에너지연구본부장을 맡고 있는 강용혁 박사가 자리를 함께 했다. 취한지는 이미 오래. 화제는 자연스레 인생사로 넘어 갔다. 이때 송 박사의 휴대폰이 울렸다. 술자리에 있는 것을 아는 며느리가 걱정하는 전화였다.

“젊었을 때는 꿈도 크고 희망도 많았지, 누구나 그랬듯이. 이제는 내 경험을 미래를 위한 밑거름으로 삼아 후학들이 열심히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내 갈 길이 아니겠어” 송 박사는 ‘돈’을 벌 기회도 많았다. 하지만 일절 쳐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송 박사 왈, 하나 뿐인 아들이 그렇게 속을 썩였단다. 그런데 이제는 결혼을 해서 아들, 며느리가 어찌나 챙겨주는지 그 맛에 요즘 인생이 즐겁단다. “아들놈이 글쎄 중학교 다닐 때부터 만날 싸움만 일삼았어. 친구들과 퇴학의 위기까지 갔었지” 어쩔 수 없이 전학을 시켜놓고 아들과 하염없이 여행을 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다른 집 자식은 일류 대학을 들어간다고들 하는데 우리 집 자식은 ‘딴따라(음악)’를 하겠다고 선포했다는 것이다. 두 번, 세 번 의지를 확인하고 음악의 길로 보냈는데 요즘은 밤새워 작곡을 하고 열심히 한단다. 송 박사의 아들은 버닝햅번(Burning Hepburn)의 보컬과 기타를 맡고 있는 송원석이다. 오늘이 있기까지 자식을 올바르게 키우고자 최전방에서 고생도 시켰단다. 열한시가 되어 아들과 며느리가 송 박사를 모시러 왔다. 그렇게 속을 썩이던 아들이 효자가 된 모습이다.

송 박사의 행보는 정년이라고 멈추지 않을 것 같다. 2009년 중국에서 개최된 저탄소(Low Carbon) 행사에 녹생성장을 접목시켜 범아시아 포럼을 만드는 작업을 추진 중이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우리 재생에너지 경제 영토를 넓혀나간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한편, 송 박사는 이달 1일자로 에기연 전문연구위원으로 선정됐다. 전문연구위원은 정년 퇴직 후 5년간 연구활동을 보장하는 제도다.

 

▲ 지난달 22일 열린 정년기념식에서 신재생에너지학회로부터 공로패를 수여받았다.(왼쪽은 대한제당 윤세왕 소장)

 

▲ 주요경력 및 포상

1979. 1 ~ 2010.12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
                     (재료연구실장, 태양광연구실장, 신발전연구부장 역임)
1986.10 ~ 1989.12 국제에너지협의회(WEC), Solar Power Committee 한국대표
1988. 7 ~ 1997.12 통상산업부 대체에너지 기술개발 전문위원(분과위원장)
1986. 1 ~ 2001.12 태양광발전 사업단장, 태양광발전 기술연구회장
1995. 1 ~ 현  재 세계에너지기구(IEA)/PVPS 집행위원 및 Task8 전문위원
1995. 6 ~ 2006. 5 한-중 신재생에너지 기술협력 실무위원회 한국대표
1999.10 ~ 2003.10 태양에너지학회 부회장(학술편집위원장 역임)
2001. 9  ~ 2002. 8 중국 연변과학기술대학 초빙교수
2001.11 ~ 2006. 5 한-몽골 자원협력위원회 한국대표
2002. 1 ~ 현  재 과학기술 총연합회 산학연 협력위원회 및 Brain Pool 위원
2002. 6 ~ 현  재 IEC(국제규격협회) TC-82 한국대표
2007.10 ~ 2007.12 경제중심 과학기술포럼 신재생에너지 분과위원장
2008. 3 ~ 2008.12 신성장동력기획단 신재생에너지 소위원장
2008. 3 ~ 현  재 에너지기술기획평가원 국제협력 운영위원장
2008. 6 ~ 현  재 한국신재생에너지학회 회장(부회장 및 편집위원장 역임)
2009. 1 ~ 현  재 녹색성장 국민포럼 위원
2009. 8 ~ 현  재 서울시 녹색성장위원회 녹색산업 분과위원장
2009. 9 ~ 현  재 한국태양광산업협회 고문
2010. 9 ~ 현  재 Green Tech. 포럼 총괄 위원
2010. 9 ~ 현  재 국제태양광학술대회(Global PV Conference) 조직위원장
2010. 10 ~ 현 재 저탄소녹색성장 국제심포지움 (ISLCT2010) 의장

1999~현재 'Who‘s Who in the World'으로 선정(Marquis Who’s Who, USA)
2001. 4  대한민국 과학기술훈장 진보장
2002. 2  'Hall of Fame' (American Biographical Institute, USA)
2002. 11  '1000 Great Asians' (Int'l Biographical Centre,  England)
2003. 6  Presidential Seal of Honor (American Biographical Institute, USA)
2005. 2  '100 Top Scientists-2005(American Biographical Institute, USA)
2008. 10  Foremost Scientist of the World (Int'l Biographical Centre)
2009. 11  PVSEC Award 수상 (국제태양광학술대회 대상)
2010. 6  2010 Gold Medal for KOREA(American Biographical Institute,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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