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과 3 Needles
남아공과 3 Needles
  • 한국에너지
  • 승인 2010.07.12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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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남아공하면 축구, 월드컵이 먼저 연상 될 것이다. 필자는 축구의 오프사이드도 구분못 하는 어설픈 팬이지만, 4년에 한번 하는 축제를 만끽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낮밤이 바뀐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이런 필자에게 남아공하면 애잔히 안개처럼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그것은 바로 2005년 부산영화제에 개봉된 ‘3 Needles’라는 영화이다. 직역하자면, 3개의 바늘? 3개의 주사기? 솔직히 주사바늘이 숨은그림처럼 3개의 스토리속에 등장한다. 이 3개의 주사바늘은 각기 서로 다른 대륙을 배경으로 주인공들의 가슴을 멍들게도 하지만, 희망의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3 Needles에서 남아공을 배경으로 한 스토리는 나의 소신을 입증하기 위하여 과연 난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이야기는 남아공에서 가장 질병에 취약한 부락에 젊고 매력적이지만, 열정만 있는 백인 주인공 수녀가 두 명의 들러리 수녀와 함께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주인공 수녀와 대립각을 세우는 사람은 바로 이 마을 주민들의 고용주이자 실질적인 권력의 우두머리인 백인 농장주인데, 어느 날 하루 이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불쌍한 마을 사람들을 돕는 것이냐에 대한 논쟁을 벌이게 된다.

주인공 수녀는 질병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의 안식처를 내어주고 당장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자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농장주는 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는 자기가 진정한 구원자라고 주장한다.
안타깝게도 주인공 수녀는 자신의 역할에 한계를 느끼고, 농장주와 어두운 거래를 하게 된다. 바로 자신의 정절을 농장주에게 바칠 때마다 불쌍한 주민들의 복지를 하나씩 개선시키는 것이다.

스토리상에서 주인공 수녀의 희생은 아름다웠다. 물론 농장주가 젊고 매력적이었다면 잔잔한 감동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눈요기감의 애로물로 전락했을 것이다.
또한, 농장주가 주인공 수녀의 교화에 힘입어, 아무 조건도 없이 사재를 털었다면, 무미건조한 다큐멘터리가 되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힘은 바로 농장주가 아주 현실적인 속물,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우리들의 욕망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숙제, 에너지 안보, 녹색성장, 고용창출은 바로 3 Needles의 남아공편에서 질병과 가난에 허덕이는 마을 주민들이 원하는 wish-list이다.
그렇다면, 에너지 안보, 녹색성장, 고용창출을 위한 정책도입시 주인공 수녀가 농장주와 타협을 봐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농장주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주인공 수녀의 능력이자 넘어야 할 산이다.

재원조달을 위한 돌파구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해외 자원개발은 오일 메이져의 leftover만 설거지하게 되며, 정책입안자와 경제주체간에 정보의 비대칭이 심화되면, 경제주체는 탄소세와 배출권거래를 신포도 취급하게 된다. 경제주체들의 신뢰를 잃으면, 녹색성장은 결국 녹색도 성장도 변변히 건지기 어렵게 되며, 억지스러운 인턴쉽으로 고용지수를 왜곡시키는 것은 고용시장을 절름발이로 만들 우려가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 수녀가 자신의 고고함만을 내세우고 농장주와의 소통을 단절하였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농장주는 마을 주민들이 모두 병들어 버리면 다른 마을로 이동하여 노동을 착취하면 그만이다. 결국 주인공 수녀는 감화할 신도를 모두 잃어버리기밖에 더하겠는가?

에너지 안보, 녹색성장, 고용창출도 마찬가지다. 명분이 있고, 그 방향이 많다는 소신이 있다면, 이제 경제주체를 설득하고 소통하는데 총력을 기울일 때다.
농장주가 주인공 수녀에게 던진 대사가 생각난다. “당신이 나를 도우면, 나도 당신을 도우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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