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사구팽과 낙하산
토사구팽과 낙하산
  • 신중린 칼럼니스트
  • 승인 2006.09.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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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사구팽은 목적을 이룬 다음에는 그 목적을 이루기까지 헌신을 다했던 동지를 버린다는 의미임은 오래전 어느 정치인이 회자시켜 누구나 알 수 있게 된 말이다.
토사구팽은 옛 춘추 전국시대의 일만은 아니고 인류 역사의 어느 시대나 도처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이며, 요즈음도 번번이 일어나고 있는 일일 것이다.
뻔한 귀결일 줄 알면서도 나만은 토끼 잡은 개가 아니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결국 본인도 토끼 잡은 개임을 실감하는 순간까지 충성의 맹세를 지키는 일이 허다할 것이다.
목적을 이룬 후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수고에 대한 보답과 희생(?)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할 터인데 그 때는 주어야할 사람에 비하여 줄 자리가 항상 모자라는 것이 세상사 이치인 모양이다.
그러니 토끼 잡은 개가 되었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되나 보다. 한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도 나름대로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어 또한 볼멘소리가 없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필요한 기능이나 능력과 자질이 다양해지고 복잡해진 요즈음에 이르러서는, 그 토사구팽의 의미를 또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커지는 세력을 견제하려는 옛 토사구팽과는 달리, 능력과 자질이 미치지 못한다면 이 시대의 토사구팽은 어쩔 수 없는 것이어야 하지 않는가? 
공을 이룬 사람을 꼭 자리로만 보답을 해야 하는가? 자리를 나누어 주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의중과는 달리, 스스로 공을 이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보답보다는 자리를 나눠주기를 바라는 경우가 더 많은가 보다. 자기의 꿈을 실현해 보고 싶기도 할 것이고, 여태까지 목적을 위해 다투었던 반대 진영 사람들에게 여봐란 듯이 으스대고도 싶을 터이니까!
그런 생각을 가진 모두에게 자리를 나누어 주자니 자연히 나누어 줄 자리가 모자랄 것이고 그러니 자리 배정의 무리가 따르게 되고, 체면과 모양새를 억지로 갖춘 낙하산 인사가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흔히 말하듯이 능력과 자질이 적재적소에 배치된다면 자리를 어디서 누가 차지하든 낙하산 인사라고 볼 멘 소리를 하겠는가?
물론 성과 없이 자라목을 높이 빼어들고 자기 순서만을 기다리는 답습의 비효율이 있는 곳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결과를 만들어 내기까지 공이 있다고 해서, 또는 고생이나 희생이 있었다고 해서, 밥벌이라도 만들어 주어야겠다며, 운전면허증이 없는 사람에게 버스운전사를 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더 큰 또 다른 희생이 따를 터이니까 ! 능력과 자질을 갖추었다면, 마음에 두었던 새로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뜻이 같고 마음을 같이 하는 사람에게 자리를 맡기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시대의 순리일 것이다.
그러나 결과를 만들어 내기까지의 ‘공(功)’과 앞으로의 일을 운영할 ‘능력과 자질’은 별개의 것이다.
자질이 없다면 ‘공’에 상관없이 더 큰 희생과 비효율을 없이 하기 위하여, 토사구팽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며 오히려 사려 깊은 지사(志士)라면 토사구팽을 자처할 일이다.

물론 결과를 만들어 내기까지의 수고와 공로에 대한 보답이 없다면 새로움을 위해서 헌신할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권력과 자리를 나누어 주지 않더라도 응분의 대접은 반드시 있어야 할 일이긴 하다.
과연 지금 우리사회는 이 시대에 맞는 적절한 보상이나 이성적 토사구팽이 행해지고 있는지 생각해 볼 문제다.
알맞은 보상에 대한 질시는 없는지, 보상을 핑계로 특혜는 없는 지, 의지와 이성적 인사에 반사적 낙하산 타령은 없는 지, 개혁 인사를 핑계로 자질 없는 낙하산은 없는 지, 우리 모두 진정한 반성이 필요한 때 인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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