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칼럼/ 초창기 LPG 국내생산과 시장개발에 대해
에너지 칼럼/ 초창기 LPG 국내생산과 시장개발에 대해
  • 한국에너지신문
  • 승인 2002.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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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19>

필자는 지난 회에 `가스화시대를 선도한 LPG'란 제목으로 우리나라 LPG산업 40여년의 성장사를 크게 태동기, 초창기, 성장기, 성숙기로 나눌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먼저 태동기인 '59년부터 '63년까지는 소량씩 용기로 수입된 LPG가 첫 선을 보였다.
'59년부터 LPG가 처음으로 미군부대에서 소량씩 유출되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어 ‘60년대에 들어 연소기기와 충전된 용기를 일본에서 수입하여 사용하면서 차츰 수요가 늘어 연간 4~500톤에 이르렀다. 이 때 LPG는 50kg 용기 300~700개씩 컨테이너에 실어 수입하고, 빈 용기는 일본으로 재반출되었다. 이렇게 소규모로 수입, 유통되다 보니 가격은 상당히 비쌌다.
 따라서 당시의 낮은 소득수준에 비추어 LPG는 처음에 일부 부유층의 가스난로용 연료에 국한되다가 그 편리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서서히 이용자가 늘어났다. 그러나 주연료인 연탄과 가격차가 커서 일반 서민들은 사용할 엄두도 못 내었고, 일부에서는 LPG 사용을 첨단 문화생활인 양 과시하는 풍조마저 있었다. 또 LPG 용기나 기구는 일종의 `사치품'으로 명동, 을지로 등 번화가나 신신백화점의 진열장에서만 판매되었다.
다음 초창기인 ‘64년부터 ’81년까지는 정유공장의 신증설에 따라 LPG의 국내생산이 개시된 이래 생산량이 계속 증가하면서 수요개발도 활발히 진행된 시기였다. 즉 국내 정유공장의 LPG 생산이 ‘64년 울산의 유공(油公: `대한석유공사'의 약칭, 현 SK)에서 개시된 이래 급격한 경제성장과 석유류 수요증대에 따라 유공의 증설, ’69년 여수의 호유(`호남정유'의 약칭, 현 LG정유), ‘71년 인천의 경인에너지(현 인천정유), ’80년 울산의 쌍용정유(현 S-Oil) 공장의 신규가동으로 이어졌다. 이로써 생산량은 ‘64년의 1천톤 미만에서 ’70년 4만4천, '75년 21만2천, '80년 33만7천, ’81년 35만6천톤으로 증가하였다. 프로판과 부탄의 생산비율은 거의 1: 2이었다.
같은 기간에 수요는 '64년 1천톤에서 ’70년 3만7천, '75년 15만, '80년 39만2천톤으로 특히 '70년대 말부터 수요가 급증하였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LPG 수급상태는 '60년대에는 거의 균형을 이루었으나 ’70년대에는 한동안 생산량이 수요증가를 앞질러 잉여량을 일본으로 수출('76년에 최고 12만4천톤)하다가 수요가 증가하면서 잉여량이 줄다가 '79년부터는 부족상태로 바뀌어 일본에서 소형 연안선편으로 수입하여 충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그 때나 지금이나 줄곧 중동에서 LPG를 대형 원양선편으로 수입하는 세계 제1의 수입국이다. ’81년 수요량 43만톤 중 프로판과 부탄의 비율은 약1:1.5, 용도별로는 가정상업용(프로판), 수송용(부탄), 산업용의 비율이 약3:4:3이었다. 수입량은 그 18%인 76천톤이었다.
그러면 '60년대의 LPG의 수요개발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국내 생산이 개시되자 사치품으로 간주되던 LPG가 급속히 대중화되었고, '65년에 프로판공업협회가 설립되고, '66년에 한일개발(주)이 서울역↔정능간 버스의 연료를 휘발유 대신 값싼 부탄으로 바꾸어 첫 LPG버스가 등장하였다. '60년대 후반에 수요가 너무 급격히 증가하자 정부는 수급안정을 위하여 수요 억제책을 채택하여 ’70년에 LPG 가격을 대폭 인상하는 한편 버스의 LPG 사용을 위한 구조변경을 중단시켰다. 결국 LPG 버스는 다시 휘발유로 환원되거나 낡아서 폐차되는 한편 연료비가 싼 디젤엔진이 개발되어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또 '60년대 말에 호유, ’70년대 초에 경인에너지가 차례로 LPG를 생산하면서 공급에 여력이 생기게 되었다. 특히 부탄의 생산량은 프로판의 2배나 되면서 수요는 그 1/3에도 못 미쳐 정유사들은 국내수요의 저변확대를 위해 대리점 지원책을 강화하는 등 수요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잉여분 일부를 일본으로 수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LPG 버스는 '70년의 LPG가격 대폭 인상과 디젤엔진 개발로 사라졌으나 ’71년 LPG를 제외한 전유종의 가격이 대폭 인상되자 다시 휘발유보다 싸져서 영업용 택시에서 LPG 사용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택시의 LPG사용은 불법이어서 음성적으로 이뤄졌고, ‘7'년 말 1차 석유파동으로 가격차가 벌어져 무허가업자에 의한 구조변경이 더욱 성행하여 안전관리면에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75년 정부는 '79년부터 LPG 택시운행 전면금지, ’75년 이후 신규차의 LPG 사용금지 등 LPG 택시 종합대책을 공포하여 그 사용을 규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조치가 업계에 큰 타격을 주게 되자 '77년 LPG 택시 억제를 부분적으로 해제하고 자동차 충전소 허가도 정수제(定數制)로 완화하였다.
한편 '70년대 들어 정부는 상공부와 서울시를 중심으로 도시연료의 편의성과 안전관리를 고려하여 도시가스 사업을 검토하였다. 시범적으로 먼저 서울 용산구 이촌동에 LPG/공기 방식의 설비를 '71년 5월 완공하여 약3천 가구에 공급하다가, 다시 대규모화가 필요하여 '72년 11월 나프타 분해방식의 제조설비를 갖추어 도시가스를 본격적으로 공급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LPG산업의 태동기와 초창기의 보급실태를 `동력자원행정 10년사'(동자부, 88년)와 `한국가스공사 10년사'(93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LPG의 확대보급에는 용기와 가스기기의 보급이 필수적이다. 앞서 언급했 듯이 LPG 산업의 태동기에는 일본에서 충전된 용기를 수입하여 사용한 뒤 재충전을 위하여 다시 반출하였다. 또 '64년 유공이 처음 LPG 생산을 개시할 무렵 국내에 유통 중인 용기는 매우 적었고 수요개발도 미흡하여 LPG를 대부분 정유공장 자체연료로 태워버렸다.
 따라서 LPG의 시장개발을 위하여 용기와 밸브의 국산화는 시급한 과제였다. 이 때 유공측의 비공식 의뢰를 받은 몇 명의 기계기술자가 일본의 관련시설을 견학하고 자체적으로 50kg, 10kg 용기와 황동제 단조밸브의 개발에 성공한 뒤 인천조선(주)의 기술부장 등으로 몸담아 유공 LPG 대리점인 태아산업(주)에 제작, 납품하였다. 당시 유공의 초대사장은 해군참모총장 출신인 이성호제독이었고, 용기와 밸브를 개발한 이는 해군공창 기술장교 출신인 김봉완부장이었다. 다만 이 기술이 뒷날 관련업계의 본격적인 용기 및 밸브 제작으로 이어졌는지는 불확실하다. 김부장은 10여년 뒤 '80년대 초부터 7년간 대성에너지(뒤에 회사명이 정우에너지, 여수에너지로 바뀜)의 사장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 LPG 산업사에 획기적인 성장기를 가져온 LPG의 지하공동저장과 중동으로부터의 대량도입을 실현시킨 장본인이다. 필자는 이 분에 관해서 뒤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


김태문 고문
〈한국가스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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