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리뷰/ 여자없는 세계
에너지리뷰/ 여자없는 세계
  • 한국에너지신문
  • 승인 2002.07.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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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영국 해군성의 명령으로 남방대륙 탐험을 위해 항로에 올랐던 새무엘 월리스가 타히티 섬에 닿았을 때 그가 타고 있던 돌핀호의 선장 죠오지 로버트슨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우리들은 모두 기뻤다. 지금까지의 고생은 말끔히 가셔졌다. 이 큰 섬에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모든 것이 있음이 틀림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오랫동안 찾고 있던 남방대륙을 발견한 것이다. 이 섬은 일행의 기운을 북돋아줄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 섬을 유명하게 만든 타히티의 아가씨들이 있었다. 그녀들의 모습을 본 승무원 모두가 미친듯이 상륙하고 싶어했다. 수주일 전에 <&26964>의사로부터 병 진단을 받은 환자들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룻밤의 위안의 대가는 적당한 길이의 못 하나로 충분했다. 이런 한가로운 생활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어느 날 상륙 중인 자들에게 귀선을 명하고 있을 때 목수가 다가와서 배의 밧줄쇠가 전부 뽑혀지고 못도 모조리 뽑혀져 버렸다고 보고했다. 한편 갑판장으로부터 해먹을 매단 못이 거의 뽑혀져 해먹을 달 수가 없어 승무원의 3분의 2가 하는 수 없이 갑판에서 잔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로부터 1년도 지나기 전에 다른 탐험가인 프랑스인 루이 앙트와느 드 부강빌이 1768년 4월 6일, 타히티섬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도 이 섬에 닻을 내린 그 손간에 매력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되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는데도 젊은 여자 하나가 선미로부터 배에 기어올라와 권양기 위의 해치 곁에 서 있었다. 이 젊은 여자는 난잡한 태도로 허리치마를 발 아래로 흘려내렸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유럽 북해의 작은 섬들 프리지아의 목동 앞에 모습을 나타낸 비너스 같았다. 아니 하늘에서 내려온 여신과도 같은 자태였다.
초긴장 상태가 해소될 수 있는 상황에서 부강빌과 선원들은 행복스런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일화 한 가지가 있다.
 타히티섬에서 유독 한 사람, 여자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아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 선원이 있었는데 실은 그가 여성이었음이 탄로난 것이다. 그녀는 고아로서 호기심과 모험심에 불탄 나머지 남장을 하고 탐험대에 가담한 것이었다. 여자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에 남은 항해동안 줄곧 그녀의 입장은 복잡 미묘했다. 어쨌든 그녀 잔느 바레는 세계를 일주한 최초의 여성이 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TIME-LIFE BOOK, AGE OF EXPLORATION)
이 이야기는 항해와 탐험은 여자없는 세계라는 것이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쉬마엘이라 불러다오, 몇년 전 나는 지갑에 돈이 바닥나거나 육지가 싫어질 때면 배를 타고 나가 바다를 봐야겠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사실 대탐험시대 이전에 남성들은 이미 세속적인 것 이상의 그 어떤 것을 추구하기 위해 바다로 내달았다.
그런데 석유탐사도 이와 똑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석유탐사란 all-male business 이다.
세속 이상의 어떤 것을 추구하는 면이 있다. `찾는다'는 것이다. 무엇을? 물론 석유일 것이다. 그러나 그 찾음에는 `석유' 이상의 무엇이 있다.
1983년도에 필자는 야간에 헬리콥터를 타고 제주도 마라도 남쪽 200km 지점에 정박해 있던 반 잠수식 시추선 Jim Cunningham호의 헬리포트(heliport)에 착륙한 적이 있다. 거기서 나는 여자없는 세계를 보았다.
바다 한가운데 수백의 휘황찬란한 전등불빛을 발하고 떠 있는 시추선 Jim Cunningham호는 해상의 궁전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시추회사인 Reading & Bates Co. 소속의 이 반잠수식 시추선(Semi-Submersible rig)은 길이 98m, 폭이 76m 정도였으며 해상 30m 정도 위에 떠 있었다.
당시는 석유공사가 직접 시추를 하지 않고 외국 시추회사가 국내 대륙붕을 시추하던 시절이었다. 이 시추선은 싱가폴 소재 Guardline Survey사로 부터 무료로 인공위성을 통한 정보를 받아 7번만에 정확히 정박할 수 있었다. 외국인들은 `정박(location)은 골프게임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다만 `Hole in one'이 없다는 것 이외에는.
시추선에서는 굉음같은 엔진 소리가 낮이고 밤이고 들려, 방음장치가 된 침실까지 뒤흔들고 있었다.
이 시추선에는 88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침대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방 하나가 2인용이거나 4인용이었다.
시추선의 근무자들은 12시간 일하고 12시간 쉬게 되어 있었으며 식사는 하루 네끼(Breakfast, Lunch, Dinner and Supper)였다.
음식은 물론 양식이었고, 4번의 식사와 디저트 외에도 커피나 쥬스를 상시로 마실 수 있었다.
이 시추선 위의 생활은 수도원 생활같이 무미한 생활이었다. 45명 정도의 외국인 근무자들은 일할 때 외에는 식사 시간이 되면 일어나 식사를 하고는 또 잠에 빠지고는 했다. 이 외국인 승무원들은 28일간 일하고 28일간의 휴가를 떠나고는 했다. 오락이라곤 비디오를 구경하는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그 비디오란 것도 SEX 장면이 있는 것은 금지하고 있었다.
그 곳은 고독하고 권태롭기만한 남자들만의 세계였다. 시간 감각이 불필요할 만큼 정지된 세계였다. 모두의 관심은 석유가 나오느냐에 쏠려있을 뿐이었다.
필자가 묵었던 방 옆방에는 51살 된 싱가폴 소재 Magcobar사의 니수(泥水/mud) 기술자 Herman Hahn씨가 묵고 있었다. 내가 가족사항을 묻자 그는 아직 총각이라고 답변하면서 이런 시추선 생활을 하다보니 혼기를 놓쳤다고 했다.
연애를 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상대가 10명쯤 되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싱가폴, 태국,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사귄 그 여자들과 결혼했다면 지금은 마누라가 10명쯤 될 것이라면서 껄껄 웃었다.

<이승재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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