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칼럼/ 가스화 時代를 선도한 LPG
에너지칼럼/ 가스화 時代를 선도한 LPG
  • 한국에너지신문
  • 승인 2002.07.0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LPG산업 40년을 회고하며 ...


초등학생인 딸이 친구 집에 다녀와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순이네는 가스로 밥을 짓고 찌개도 끓인대.” “얘, 순이네는 굉장히 부잔가 보다.” 지금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이 얘기가 약40년 전인 60년대 초에는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하기야 그 시절에는 “철수네 집에는 텔레비(물론 흑백)가 있다”든가 “영이네 집에는 전화가 있다”고 하면 모두 꽤 잘 사는 집으로 알지 않았던가?
이제 우리나라 LPG산업이 지난 40년간 성장해온 모습을 회고해 보기로 한다.
먼저 한말에 처음 등장했다가 일제 강점기를 거쳐 ‘50년대에 없어진 옛 도시가스의 발자취부터 더듬어 보자. 도시가스란 배관으로 공급되는 가스연료이다.
거의 백년 전인 구한말 1909년에 일본인이 설립한 일한와사(日韓瓦斯: “와사”는 가스의 한자표기)가 서울 용산에서 석탄을 원료로 한 석탄가스를 등화용으로 공급 개시한 것이 우리나라 도시가스의 효시이다. 이어 회사명을 일한와사전기(주)로 바꿨다가 한일합방(‘10년) 후 가스시설을 증설하고, ‘15년 다시 경성전기(京城電氣)로 개명했고 전기의 보급과 더불어 가스의 수요는 등화용이 아닌 가열용으로 전환되었다. 또 부산에서는 일본인이 설립한 회사가 ’12년부터 가스공급을 개시했고, ‘40년대 초에는 경성전기(주)가 왕십리와 부평에 가스 제조시설을 신설하여 석탄가스와 코크스를 추가로 공급하였다. 이들 회사는 광복(’45년)후 원료공급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6.25(‘50년) 와중에 시설파손과 경영난에 봉착하여 ’50년대 중반에 거의 사업이 중단되고 이어 ‘60년대 초에 시설마저 철거되었다.
그 뒤 도시가스가 다시 등장한 것은 ‘70년대 초이다. 서울시는 ’71년에 용산구 이촌동에 시범적으로 LPG/공기 방식의 설비를 갖추고 3천여 가구에 가스를 공급하다가, 다시 ‘72년에 강서구 염창동에 나프타 분해방식의 제조설비(50천m³/일, 7,000 kcal/㎥)를 갖추고 도시가스를 본격적으로 공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80년대 초까지 약10년간 수요는 거의 증가하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했다.
LPG는 ‘59년에 첫 선을 보인 뒤 ’60년대 초에 충전된 용기로 수입되어 미미하게 소비되었다. ‘64년부터 국내생산이 시작된 이후 수요개발이 병행되어 수급량이 상당히 늘었으나 ’80년에도 40만톤에 미치지 못했다. 그런 LPG산업의 모습은 ‘82년부터 시작된 대량수입과 함께 놀라운 성장세로 바뀌게 되고, 뒤이어 ’87년부터 시작된 LNG의 대량수입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가스화 시대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제 그간 가스연료가 초래한 우리 부엌의 변모를 되돌아보면 “혁명”이란 말이 과장이 아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사용하던 주연료는 줄곧 신탄(薪炭: 땔나무와 숯)이던 것이 ‘60년대부터 차츰 연탄으로 바뀌었다. ’80년대에 용기에 든 LPG와 배관을 통한 도시가스가 널리 보급됨에 따라 부엌에서 가스는 주로 취사에만 사용되고, 난방기능은 가스보일러나 열병합 시스템으로 이양되었다. ‘6~70년대 전국적인 연탄보급과 ’70년대 초에 시작된 벌채금지로 우리의 헐벗은 산은 차츰 우거지게 되었으나 연탄은 인명과 환경에 큰 위험을 초래하는 부작용을 낳았었다. 당시 연탄가스 중독으로 매년 수천명이 고통을 겪었고, 혼수상태로 응급실로 실려가고,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는 사람도 수백명 씩이었다. 또 대도시의 엄청난 연탄재를 치우는 일이나 그로 인한 대기중 먼지는 큰 난제였다.
가스연료의 본격적인 보급은 많은 주부들을 바쁜 일손과 연탄가스 중독의 위험에서 해방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도시의 연탄재 치우기와 먼지 발생을 덜어주고 우리가 숨쉬는 대기를 훨씬 맑게 해주었다. 또 우리나라 도시가스의 주원료로서 ‘80~90년대의 엄청난 성장세를 뒷받침한 것은 처음 ’80년대 약10년간은 LPG, 다음 ‘90년대에는 LNG였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LPG를 사용하는 가정과 업소수는 도시가스 사용가구와 비슷한 800여만 가구, LPG 자동차는 택시를 포함하여 약150만대이다. 연간 소비량은 약750만톤으로 대략 LNG의 1/2수준이고, 용도는 수송용, 가정상업용, 산업용, 화학원료용, 도시가스용의 차례이다.
이와 같이 LPG는 이제 LNG와 함께 깨끗하고 편리한 연료로서 우리의 일상생활 속으로 깊이 들어와 있다. 더러 LPG는 위험하고, LNG는 안전한 것이라고 오해하는 이도 있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가정에서 LPG와 LNG(도시가스)는 제대로 알고 쓰면 모두 안전하지만 새거나 잘못 쓰면 모두 위험하다. 따라서 가스를 쓰는 사람은 바른 사용법을 익히고, 정기적으로 시설을 점검해야 한다.
이제 “LPG”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떤 것인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폭발”이나 “위험”을 연상할 지도 모르지만 실상은 도시가스와 마찬가지로 잘 사용하면 전혀 위험하지 않은 깨끗하고 편리한 가스연료이다. LPG는 부엌에서 일하는 주부들의 일손을 덜고 연탄가스를 안 마시게 해준 고마운 존재이다. 언제든 금방 밥을 짓고 국을 끓일 수 있어 남편들도 부담없이 부엌으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야외 나들이에서 휴대용 레인지는 얼마나 편리하게 고기를 굽고 찌개를 끓일 수 있는가? 또 우리나라에는 흔치 않지만 큰 풍선처럼 생긴 형형색색의 열기구(熱氣球)가 하늘을 떠다니는 광경을 영화나 TV에서 보게 되는데 이 열기구를 공중에 띄우는 연료가 바로 LPG(프로판)이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LPG는 지난 40여년간 어떤 과정을 거쳐 보급되었는지 알아보자.
LPG산업 40여년의 성장사는 크게 태동기, 유년기, 성장기, 성숙기로 나눌 수 있다.
태동기(‘59~’63년)는 LPG가 국내에 첫 선을 보인 시기로 충전된 용기를 소량씩 수입하여 이를 일부 부유층만이 사용하였고, 유년기(‘64년~’81년)에는 LPG의 국내생산과 수요개발이 순조로이 성장하면서 수급이 대체로 균형을 이루었다. 성장기(‘82~’92년)에는 중동으로부터 LPG의 대량수입과 적극적 보급으로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성숙기(‘93~'00년)에는 수요면에서 가정상업용 정체, 수송용 급증, 산업용 증가, 도시가스용 급감으로 전체적으로 성장세가 둔화하였고, 국내생산량은 상당히 증가하여 수입수요가 약간 감소하였다.
각 시기별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기회에 설명하기로 한다.

김태문 고문
〈한국가스학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