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칼럼/ 탄화수소 시대의 인간형, 아르메니아人 걸벤키안
에너지칼럼/ 탄화수소 시대의 인간형, 아르메니아人 걸벤키안
  • 한국에너지신문
  • 승인 2001.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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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에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 카뮈가 시쉬포스의 신화(Le Mythe de Sisyphe)라는 평론을 발표했다. 이 책의 부제에 있듯이 <부조리에 관한 시론>이며, 소설 《이방인》과 짝을 이룬다는 평을 받고 있다.
 시쉬포스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인데, 신들에게서 바위를 산꼭대기에 운반하는 형벌을 받았다. 이 바위는 산꼭대기에 도달하면 굴러 떨어져서 시쉬포스는 영원토록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운반하는 작업을 되풀이해야만 한다. 무익하고 희망이 없는 노동보다 더 무서운 형벌은 없다고 신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카뮈는 시쉬포스 안에서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을 보았다. 인간 존재의 무의미성을 자각하면서 이 부조리에 대하여 반항을 기도하는 인간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지만, 이 인간의 운명에 비참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행복을 발견하고 있는데 그의 독자성이 있는 것이다.
즉, 무익하게 돌을 굴려 산꼭대기를 반복해서 끌어올리는 그 행위 자체가 행복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고대 그리이스 신화 속의 인물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드디어 돌을 산꼭대기에 올려놓은 자들이 있다.
탄화수소 시대(Hydrocarbon Age)의 영웅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래서 탄화수소 시대가 빚어낸 숱한 인간형들 중 아르메니아인 걸벤키안의 이야기는 가히 세계를 동요시키며 산꼭대기에 돌을 올려놓고만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아르메니아인 칼러스트 걸벤키언은 석유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가문의 2세대였다. 부친은 러시아산 등유를 오스만제국으로 수입 판매하여 부를 축적한 사람으로, 황제로부터 흑해 항의 통치권을 하사 받은 바있는 부유한 아르메니아 출신의 석유사업가인 동시에 은행가였다.
 실제로 그의 가족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살았다.
그는 프랑스어를 익히기 위해 마르세이유에 있는 중등학교에 다녔다. 그 후 런던의 킹스 칼리지에서 광산공학을 배웠으며, 새로운 석유산업의 기술에 관한 주제로 졸업논문을 썼고, 1887년 19세가 되던 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킹스 칼리지의 한 교수는 이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약관의 아르메니아인 학생에게 프랑스로 가서 물리학을 더 공부하도록 권했다. 그러나「학문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의 아버지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대신 그의 아버지는 그의 가족들이 누리고 있는 부유함을 가능하게 해준 바쿠로 그를 보냈다. 청년 칼러스트는 처음 보게 되는 석유산업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분출하는 석유로 범벅이 되었으나 석유는 <질이 좋고 매끄러웠기>때문에 그에게 있어 그것은 결코 불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돌아오리라고 맹세했지만, 그 후 한번도 바쿠를 찾아가지 않았다.
걸벤키언은 1889년 프랑스의 한 유력한 잡지에 러시아 석유에 관한 연재기사를 게재해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1891년에는 이를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이것으로 그는 약관 21세의 나이에 세계적인 석유 전문가 중의 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이 무렵 터키 황제는 두 명의 관리를 그에게 보내 메소포타미아의 석유부존 가능성을 조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메소포타미아를 직접 방문하지 않고, 독일 철도기사와의 대담과 다른 사람들의 저서를 통해 내용이 풍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는 그 지역은 석유매장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말했고, 그 결과에 터키의 관리들도 그렇게 믿었으며, 그 자신도 확신을 가졌다. 그렇게 해서 메소포타미아 석유에 일생을 바친 칼러스트 걸벤키언의 생애가 시작되었으며, 그는 60여 년 이상을 이상하리만큼 열정적으로 이 지역에 대해 집념을 보였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걸벤키언은 양탄자 판매를 포함한 몇몇 사업에 손을 댔으나 그중 특별히 성공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정식의 거래로부터 뒷거래, 터키식 뇌물, 그리고 유익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정보 입수법 등 상거래 관행을 확실히 몸에 익힐 수 있었다. 또한 근면성과 통찰력, 협상기술도 몸에 익혔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상황을 진행시킬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초기 상거래 시절에 걸벤키언은 불굴의 정신과 인내심도 키웠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그의 큰 자산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쉽게 결심이 흔들리지 않았다. 후에 어떤 사람들은「걸벤키언 씨 보다 화강암을 비틀어 짜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걸벤키언은 또 다른 일면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떤 것도 믿지 않았다. 후에 걸벤키언의 미술품 전시회를 도왔으며, 미술평론가이며 런던의 국립미술관의 관장이었던 케네스 클락은 「나는 그렇게 의심이 많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처럼 극단적으로 사람을 의심하는 경우를 만나보지 못했다. 그는 항상 자신을 위한 스파이를 고용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예술품을 구입하기 전에 그 작품을 평가하기 위해 두세 명의 전문가를 고용했다. 이러한 경향은 나이가 들수록 심해졌다. 그는 106세까지 살았던 그의 할아버지보다 오래 살겠다는 집념으로 특별히 두 명의 의사를 고용해 서로의 진찰 결과를 체크하게 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러한 신중함은 오스만 터키 제국의 말기에, 기회와 박해 사이에서 불확실한 삶을 살고 있던 아르메니아인인 그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1896년 걸벤키언은 당시 주기적으로 벌어지던 터키 정부의 아르메니아인 대규모 학살 행위를 피해 이집트로 도망갔다. 그곳에서 그는 두 명의 유력한 아르메니아인, 즉 바쿠로부터 온 석유부호와 이집트 통치를 지원하는 누바 파샤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다. 이들과의 교분은 그에게 석유와 국제금융에 관한 식견을 높혀 주었다. 그리고 그는 바쿠 석유의 판매 총책임자로 런던에서 그 자신의 입지를 세울 수 있었다.
런던에서 걸벤키언은 새뮤얼 형제와 석유산업계의 거물인 네델란드인 헨리 디터어딩과 만나 협력관계를 맺었다.
그가 최초로 한 거래 중 하나는 종국에 가서 중동석유산업의 창시자인 영국인 윌리암 녹스 다아시에게 넘겨진 페르시아 석유이권이었다. 그와 헨리 디터어딩은 아르메니아인인 키타브기가 페르시아 정부의 석유이권 판매를 담당, 당시 파리에서 알선한 석유이권에 관한 최초의 계획에 대하여 심사숙고하였다. 그러나 걸벤키언이 나중에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매우 무모한 것이며 매우 투기적으로 보여, 노름꾼들에게나 사업으로 여겨질 만한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거절했다. 그후 앵글로-페르시안의 관계 진전을 우울한 눈길로 바라보며 그는 후에 인생의 지표가 될 좌우명을 만들었다. 그것은 「결코 석유이권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페르시아 인근의 메소포타미아에서 많은 역경을 겪으며 말없이 그 좌우명을 실천했다. 1907년 걸벤키언은 나중에 쉘사를 설립, 석유산업계의 거물들이 된 영국의 유대인 새뮤얼 형제를 설득하여 콘스탄티노플에 사무소를 개설하였고 자신이 이를 경영했다. 그 무렵 반아르메니아 감정은 진정되었으며 걸벤키언은 매우 바빴다. 다른 여러 가지 사업들을 수행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터키 정부와 파리 및 런던 주재 터키대사관의 재정자문관이었으며, 터키 국립은행의 대주주였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그는 영국과 독일 그리고 로얄 더치 쉘(더티어딩의 로얄 더치와 새뮤얼의 쉘사가 합병)을 터키 석유회사에 참여시켰다. 그러나 그 작업은 상당한 신중을 요했으며, 그가 말한 바와 같이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일단 터키 석유회사가 설립되자, 1912년 이후 영국정부는 방향을 전환해 이 회사를 다아시가 이끌고 있는 앵글로-페르시안 신디케이트와 합병시켜 공동으로 석유이권을 획득하려는 노력을 경주했다. 결국 영국과 독일정부는 행동통일에 합의하고 계약이 체결되었다. 1914년 3월 19일자 영국 <외무부 협정>문서에 의하면, 영국의 참가비율이 가장 컸다. 앵글로-페르시안 그룹이 새로운 컨소시엄 지분의 50%를 가지게 되었으며, 나머지는 독일은행과 쉘이 25%씩 나누어 가졌다. 이제 걸벤키언에게 얼마만큼을 분배할 것인지만이 남아 있었다. 앵글로-페르시안 그룹과 쉘 간의 합의에 따라 그들은 걸벤키언에게 총지분의 2.5%씩에 해당하는<은혜이권(恩惠利權)>을 양도했다. 이것은 주주로서의 표결권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주식의 소유에 따른 모든 금전적인 이익만을 그가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미스터 5퍼센트>가 탄생했으며, 이것은 세간에 알려진 그의 별칭이 되었다.
10년간에 걸친 싸움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당시 여기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중요한 약속을 했다. 이 약속은 향후 10년 동안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는데 그것은 <無私條項(무사조항)>의 합의였다. 오스만 제국 내에서 석유생산에 종사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터키 석유회사를 통해>공동으로 참여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무사조항>이 적용되지 않았던 유일한 지역은 ―이집트와 쿠웨이트, 그리고 터키-페르시아― 국경에 있는 <이양지역>이었다. 이 조항은 향후 수년간 중동지역의 석유개발에 기초가 되었으며 거대한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다만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세계적인 대 석유사업에서 개인이 5%의 지분을 소유한다는 것이 가히 세계를 경악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 탄화수소 시대의 전형적 인간 걸벤키안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추출해 낼 수 있는가?
그보다 우선 우리가 그저 단순히 상상해볼 수 있듯이 시초에 탄화수소 시대를 연 오일맨(oil man)들은 그저 마이더스(Midas)와 같은 황금병에 걸린 유랑의 무리에 불과했을까?
전혀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석유산업의 역사 초기에 석유를 찾아 세계 각지를 누비고 돌아다녔던 와일드캐더(wildcatter)들의 정신 상태에 대해 의학적으로 진단을 내리자면 '초긴장(hypertension)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미국의 와일드캐터들에 대한 저작을 남긴 새뮤얼 W. 테이트 2세는 말한 바 있다.
보통 초긴장 상태를 사는 사람들은 만성적인 불안스러움, 즉 이완상태가 되기 불가능한 증세를 나타낸다고 한다. 긴장이 하루 이틀이 아니고 장기간 계속될 때 충분히 그러리라 짐작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와일드캐터들에 있어서 영일은 없었다. 그들은 하나를 찾으면 본능적으로 또 다른 것을 찾아 나서는 찾음의 연속적인 생을 영위했던 것이다. 이 연속된 찾음의 초긴장 상태가 목표하는 것은 무엇인가? 일확천금일까? 석유를 찾는다는 일종의 도박에는 돈을 노리는 도박 이상의 무엇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한 시대의 특이한 현상으로서의 와일드캐터들의 이동상태의 본질을 파악해 가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와일드캐터들이 초긴장 상태를 즐겼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온, 그들의 초긴장 상태의 향락이 창출해낸 탄화수소 시대는 인류사의 어느 시대에 못지 않게 흥미진진한 점이 있었다. 온갖 활약, 온갖 음모, 온갖 술책, 온갖 지략, 온갖 투쟁, 온갖 승리 등 어느 시대보다 인간성이 뚜렷이 부각된 시기였고, 그만큼 휴매니티(Humanity)를 느끼게 한 시대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시대적 성격을 탄화수소 시대의 거인 걸벤키언에게서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후세들은 짙은 인간의 냄새가 나는 이 탄화수소의 시대에 대한 향수에 젖게 될 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 탄화수소 시대의 성격이 20세기의 시대적 성격으로서, 20세기의 인간 활약사로서 한 차원 더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대니엘 여긴, 'Prize', 고려원, '황금의 샘' 참조)

<이승재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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