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동화 최우수> 할아버지의 부채
<창작동화 최우수> 할아버지의 부채
  • 한국에너지신문
  • 승인 2001.07.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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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네 집에 시골에서 한약방을 하는 할아버지가 오셨습니다.
할아버지는 키가 작습니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은 수세미처럼 주글주글합니다. 손에는 낡은 부채를 들고 계십니다.
"집에 선풍기 있는데 부채는 뭐 하러 가져오셨어요."
엄마는 잔뜩 부어 있습니다.
"여름에는 부채가 최고지. 선풍기 바람 많이 쐬면 몸에 안 좋다. 전기 는 또 오죽 많이 들겠냐."
할아버지는 선풍기를 끄십니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조금만'입니다. 조금만 더 아껴 쓰라고 할아버지의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지우네 집에 할아버지가 오시면 엄마는 할아버지와 자주 얼굴을 붉힙니다.
"난 큰 게 좋아. 뭐든지 커야 편하지."
엄마는 큰 것을 좋아합니다. 자동차도 더 큰 것을 사고 싶어하고, 아파트도 더 큰 대로 이사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엄마는 앞 동에 사는 대식이네 집이 부럽습니다. 대식이네 집은 뭐든지 곱절로 큽니다. 지우네 보다 아파트도 크고, 차도 배는 큽니다.
"대식이는 저렇게 큰데 넌 할아버지 닮아서 왜 그렇게 작니?"
대식이를 만나면 엄마는 지우에게 꼭 한마디합니다.
엄마는 물을 세게 틀어 놓고 과일을 씻습니다. 수도꼭지에서는 물줄기가 '쏴'하고 세차게 흘러나옵니다.
"어멈아, 수압이 너무 세면 아까운 물이 낭비가 된다. 날도 가문데 물을 조금만 아껴 써라!"
"물줄기가 세야 잘 씻겨요. 그리고 저희 집은 아파트라 물 걱정 안 하셔도 되요."
엄마의 앞치마는 물에 젖어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살며시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십니다.
"물이 왜 갑자기 약하게 나오지.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옹달샘처럼 조용히 흘러나옵니다.
엄마는 수도꼭지를 만지작거립니다.
"어멈아, 내가 수도계량기의 수압을 낮췄다. 수압을 조금만 낮춰도 많 은 물을 아낄 수 있지. 물 한 방울을 쓰기 위해서도 에너지가 있어야 한단다."
할아버지는 흐뭇해하십니다.
토요일 오후입니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지우와 대식이가 또래 아이들이랑 놀고 있습니다.
"오늘도 내가 대장이다!"
대식이는 멋진 장남감 총을 들고 서 있습니다.
"왜, 너만 매일 대장을 하니?"
지우가 묻습니다.
"넌 나보다 조그맣잖아. 나처럼 커야 대장을 하는 거라구. 그리고 너희 집 차는 손바닥만한 경차잖아. 너희 집에는 에어컨도 없고."
대식이가 우쭐거립니다.
"애들아, 우리 집에 가서 놀자. 에어컨 바람이 정말 시원해."
아이들은 대식이를 따라 우르르 몰려가고, 놀이터에는 지우만 혼자 남습니다.
"아빠, 우리도 에어컨 사요. 요새 에어컨 없는 집 우리 밖에 없어요."
지우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빠를 보고 조릅니다.
"이 참에 차도 바꿔요. 작아서 불편하기도 하고, 남 보기에도 창피해 요."
엄마도 거들고 나섭니다.
"차가 고장이라도 나서 안가냐?"
할아버지는 걱정스런 얼굴입니다.
"아니에요."
"그러면?"
"오늘같이 부부동반 모임에라도 나가려면 차가 너무 작아서 …."
엄마는 조그만 차를 타고 친구들 모임에 가기가 정말 싫습니다. '너희 아직도 경차 타니?' '그렇게 아껴서 뭐 하니, 쓸 때는 써야지' 지난 모임에 친구들이 한마디씩 던지던 이야기가 떠올라 엄마는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크다고 다 좋으냐, 제 분수에 맞아야 좋지. 자동차가 크면 큰 만큼 기름도 많이 들지. 사람도 마찬가지야. 요즘 사람들은 큰 것을 좋아하는데 사람이 몸집이 커지면서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쓰지. 아주 옛날에는 사람들 키가 우리 '지우'만 했지. 지금은 다들 몸집이 커서 옛날 사람들 열 배는 먹고 쓰지. 그게 다 에너지인데, 에너지를 많이 쓸 수록 새 한 마리, 꽃 한 송이가 사라져 간단다. 공룡 좀 봐라. 덩치가 크다고 해서 살아남았더냐. 이러다 사람이 공룡처럼 커져서 나중에는 모두 사라지게 될까 두렵구나."
할아버지는 목청을 돋웁니다.
"여보, 차 이야기는 다음에 하고, 어서 외출할 준비나 하구려."
아빠는 자꾸 시계를 쳐다봅니다.
아빠와 엄마는 모임에 가고, 집에는 할아버지와 '지우'만 있습니다.
아, 더워. 대식이네 집은 얼마나 시원할까! 지우는 커다란 에어컨이 있는 대식네 집이 부럽습니다. 그냥 대식이 보고 대장 하라고 그러고 대식이네 집에서 놀 걸 그랬나. 지우는 연신 맞은 편 대식이네 집을 바라봅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오늘밤에 기온이 40도까지 올라갈 것'이라고 합니다. '연일 되는 무더위로 전력 사용량이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지구가 오염이 되어서 날씨가 덥단다. 우리가 쓰는 에너지는 화석 연료에서 나온단다. 에너지를 얻기 위해 화석 연료를 태우면 이산화탄소 등 매연이 나오지. 그게 온실처럼 지구를 덮어서 갈수록 지구가 뜨거워지는 거란다. 에너지를 아끼면 아낀 만큼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지. 세상은 둥근 원과 같아서 모두가 맞물려 있지. 하나가 좋아지면 다른 것도 조금씩 좋아지고, 하나가 나빠지면 다른 것도 나빠져. 나만 잘 산다고 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노력해야 잘 살 수 있는 것이 세상살이란다."
"……."
'지우'는 시원한 에어컨 생각에 할아버지 말씀은 들리지 않습니다.
오늘은 비가 오시려나? 할아버지는 하늘을 쳐다보십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습니다.
"아버님, 차가 막혀서 집에 못 가고 있거든요. '지우'랑 저녁 진지 차려 드세요."
밤이 깊어 가는데 아빠와 엄마는 차들로 길이 막혀 집에 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양식 없이 혼자 타고 다니는 차들이 너무 많아요. 같이 타고 다니면 길이 덜 복잡 할텐데. 안 바쁘면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고, 가까운 거리는 걸어서 다니지 원. 그러면 아버님 말씀처럼 에너지도 아끼고 좋을 텐데."
엄마는 혀를 찹니다.
"말 한번 잘했구려. 당신도 시장 갈 때 혼자서 자가용 몰고 가잖소."
아빠의 이야기에 엄마는 얼굴이 빨개집니다.
"할아버지 무서운데 방 불은 왜, 끄세요?"
'지우'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묻습니다.
"필요 없는 등은 꺼야지. 집집마다 한 등씩 끄면 수십 억 등을 끌 수 있지. 수십 억 등을 아끼면 세상은 아낀 만큼 더 잘살게 된단다. 사람만 잘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새도 나무도 다람쥐도 다같이 잘 살게 된단다."
할아버지는 거실 등만 남겨두고 불을 모두 끄십니다.
"다른 집은 모두 불이 환하게 켜 있어요."
'지우'가 볼멘소리를 합니다.
아파트 단지는 '지우'의 말처럼 집집마다 불이 켜져 대낮처럼 밝습니다. 여기저기서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립니다.
"남들이 그런다고 우리도 그러면 되느냐. 우리가 시작하면 다른 이들도 따라 온단다. 무슨 일이든 처음 시작하기가 어렵지 한번 시작하고 나면 공기처럼 편해지지."
할아버지가 '지우'에게 부채질은 해줍니다.
'지우'는 약한 부채 바람이 싫습니다. 날씨는 푹푹 찌는데 우리 집에도 에어컨이 한 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부채 바람이 약해도 조금만 참고 있어봐라. 부채 바람만큼 시원한 것이 없다. 에어컨, 에어컨 하는데 뭐든지 분수에 넘치면 탈이 난단다."
할아버지는 덥지도 않은 지 웃고 계십니다.
저녁 9시가 다되어 갈 때쯤입니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아파트 단지의 불이 모두 나갔습니다. 에어컨을 너무 많이 사용하여 과부하로 변전소가 탔습니다. 세상은 온통 껌껌해졌습니다. 집집마다 베란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놀이터에 나가서 아빠랑 엄마를 기다리자구나!"
할아버지랑 '지우'는 돗자리와 부채를 들고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놀이터로 갑니다. 놀이터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은행나무 밑에다 돗자리를 깝니다. '지우'는 할아버지 무릎을 베고 눕습니다.
"지우야!"
대식이가 힘없이 '지우'를 부릅니다. 대식이는 아버지의 등에 업혀 병원에 가는 길입니다. 얼굴이 노래져 있습니다.
"에어컨 바람을 너무 쏘여서 냉방병이 왔네. 거기다 너무 많이 먹어서 체했어. 여기다 눕히게나."
할아버지는 능숙한 솜씨로 대식이의 몸을 주무릅니다. 얼마안가 대식이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돕니다.
"어르신 고맙습니다!"
대식이 아버지가 연신 절을 합니다.
"에어컨 바람은 너무 쏘이지 말게. 뭐든지 자연스러운 것이 사람에게는 좋아."
할아버지는 '지우'랑 대식이에게 부채질을 해줍니다. 세상이 온통 컴컴해서 하늘에 떠 있는 별이 다 보입니다.
"할아버지, 별이 보여요."
'지우'가 별을 손으로 가르킵니다.
"별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단다. 우리가 못 보았을 뿐이지."
할아버지 이마에서는 부채질을 하느라 땀이 송이송이 맺힙니다.
'지우'는 할아버지의 무릎에서 곤히 잠이 듭니다. 꿈 속에서 '지우'는 깨끗한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부채는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씻어내고 있었습니다

이 자 윤
(경기도 양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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